2017. 4. 25.

퇴사결심 1년
























1.
오늘 스터디 파트너 언니에게 입학시험 전형이 바뀌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맙소사.
시험이 고작 반년 남았는데, 이노무시키들. 결국 학원 수업을 하나 더 들어야 한다.
그게 다 돈인데. 으으으.

대학원 홈페이지를 한바퀴 휘리릭 돌아보고나니 덜컥 겁이 났다.
올해도 잘 안 되면 그땐 정말 어쩌지.
잘 하고 있는 걸까?



2.
체면을 지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학원에 낙방하고 가장 괴로웠던 건 물론 '내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었지만 '쪽팔림'도 못지 않았다.


퇴사, 퇴사, 퇴사 직전 반년 동안은 거의 곡을 했다.
(노래를 불렀다고 쓰려고 했지만 이 회사가 하고 있는 일과 팔고 있는 상품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는다고 버거킹에서 점심을 먹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던 게 생각나서 곡을 했다고 고쳐 썼다.)

회사는 출근도장을 찍으면 월급을 준다. 규칙적으로 얼굴을 보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수백통의 메일을 보내고, 전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받은 돈으로 대학생 때는 서점에서 적어도 세 번은 펼쳐보고 1시간을 고민해도 겨우 한 권 살까 말까 했던 책들을 이틀에 한 번 꼴로 거침없이 사제끼고, 초밥을 사먹고, 동생들 만나 맛난 거 먹이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갈 때 이런 저런 걸 챙기다 보면 또 한 달이 지나갔다. 그것도 그것대로 즐거웠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게 행복이지, 이렇게 부품같은 인생도 괜찮겠다, 그래, 영화판 같은 거 역시나 내 길이 아니었어, 대학원은 무신,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거야, 싶었다.

하지만 전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늘 내가 하는 일을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다.
회사 이름도 잘 얘기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쪽팔려서.
회사가 아니라, 표리부동한 인생을 살고 있는 스스로가 쪽팔려서.
졸업하기 전까지는 진로로 고민하는 친구나 동생들에겐 좋아하면서 잘 할 수 있는 걸 업으로 삼으라고 내 같잖은 경험을 팔고 다녔다. 하지만 정작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회사에 다녔다. 
그러는 동안 제 갈 길 가겠다고 나선 고집 센 친구들은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아차 싶었다.

3년이나 같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놓고도 내가 하는 일을 남들에게 설명하기 꺼려진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3.
고로, 쪽팔리기 싫으니까 5월부턴 바짝 정신 차려야지.
바뀐 에세이 시험 연습도 하고 ㅠ 통역 연습도 녹음하면서 ㅠ 들어야지 ㅠ
(번역하면서 제일 괴로운 건 초고를 퇴고하는 일과 인쇄된 내 문장을 읽는 일이며
통역하면서 제일 괴로운 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또 들으며 교정하는 일이다. 다들 자기 결과물을 들춰보고 자기 전에 벽 한번씩 차고 그런 거지?)




냉탕과 온탕 사이,





어렸을 때부터 대중목욕탕 가는 걸 싫어했다.

그게 아마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일텐데, 왜 나는 낯선 사람들과 옹기종기 붙어 앉아 때를 밀고 단체로 탕에 몸을 담궈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때문에 괴로웠던 건 아니고 그냥 동네 친구들을 목욕탕에서 만나는 게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할머니나 엄마를 따라 마지막으로 목욕탕에 간 것은 국민학교 1학년때였고 (2학년때 초등학교로 바뀌었을걸?) 
그 다음으로 목욕탕에 간 것은 유학을 앞둔 나를 위해 친구들이 '한국적인 추억'을 만들어 주겠다며 억지로 찜질방에 끌고 간 고3 봄이었다. (나는 고3 4월에 자퇴했다.)

억지로 목욕탕에 가면 대부분의 시간은 온탕에 앉아 있었다.
수영을 하기도 하고 (말했지? 엄마가 나 수영 선수 시키려고 했었다고?) 맞은 편에 앉은 아줌마보다 오래 앉아 있기 내기를 (아줌마는 내가 당신과 내기 중인 걸 꿈에도 모르고 나 혼자 은밀하게) 하기도 했다. 몇몇 아줌마들은 온탕에 한참 앉아 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냉탕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얼음장같은 물에 한쪽 종아리만 담그고 "아이고 추워!" 하면서 서서히 탕안으로 들어가서, 앉지는 못하고, 찬물을 등 뒤로 끼얹기 시작했다. 세례받는 예수처럼 허리께 오는 찬물에 몸을 담그고 바들 거리며 서 있다 곧 온탕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어려서도 추운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멋도 모르고 온탕에 있던 아줌마들을 따라 냉탕에 바로 들어갔다 기겁을 하고 온탕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여전히 온도가 급작스럽게 변하는 환경에 취약하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네? 
인간은 변온동물이 아니니까 그런 건 누구에게나 적응하기 힘든 일인거지.
일교차가 큰 시기엔 감기가 유행하는 것처럼.

정정한다. 나는 유난히 취약하다. 그중 추위는 쥐약이다.  


환절기처럼 온도차가 큰 사람들이 있다.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다가 어느날 갑자기 냉담해지는 사람들.  
방점은 '갑자기'에 찍힌다. 계절처럼 서서히 변하는 건, 사람이면 당연하다. 감정이 끓고 식는 것도 당연하다. 근데 그거 말고. 

혈액 순환에 좋다며, 피부에 좋다며, 관계에는 긴장감이 필요하다며, 어느 정도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나는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으면 자책으로 귀결한다. 왜지? 내가 뭘 잘못했을까? (했나,가 아니라 했을까,다. 이미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어쩌지? 
마음이 몸살 감기를 앓는다.


와펜이라도 만들어서 달고 다녀야할까, 'I am a homeothermic animal. Prone to affection.'



+
정온 동물은 homeothermic animal
변온 동물은poikilothermic animal



2017. 4. 19.





글을 보더니 슬프다, 넌 너무 낭만적이다, 문자가 오는 거야.
분명 즐거운 연애였는데, 그래서 슬픈가.
아니면 다들 그렇게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의 '우리'가 있는 걸까?



2.
나는 크리스마스에 이별을 고하는 못된 여자친구였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주일만에 다시 이별을 고해서 한 해의 마지막 날 두번째 이별을 고하는 정말 못된 여자친구였다.



3.
헤어지고 반년쯤 지났을 때, 영화제에서 다시 만났다.
영화제 10주년이었어서 그랬던가, 역대 수상작 감독을 모두 초대했었다.
나는 안내와 초청 티켓 배부를 맡고 있어서 곧죽어도 한 번은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눠야 했다. 숨고 싶었다. 원래 헤어진 연인은 다 그런건가. 알 턱이 없었다. 헤어지면 칼같이 끊는 편이라 헤어진 사람과 다시 연락하거나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고 존댓말로 인사했다.
너는 웬 존댓말이냐고 웃었다.
나는 어색하니까요, 라고 다시 존댓말로 답했다.
니가 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무슨 영화 보러 오셨느냐고 선수쳤다.
너는 영화 제목을 이야기 했고
나는 다년간 체득한 노련함과 신속함으로 즐거운 관람되시라고 영화표를 건내며 서비스 미소를 날렸다.

너는 약간 주춤하더니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3일동안 마주쳤다. 

시간되면 차 한 잔 하자는 너의 말에 사실 반, 거짓 반, 데스크에서 정신이 없다고 이따 행사 때 보자고 웃었다.
그제서야 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줄 게 있어서. 손 내밀어 봐." 했다.
멍청한 나는 "왜? 수고한다고 용돈 주는 거야?" 같은 소릴 했고
너는 내 뻔뻔한 손바닥 위에 가벼운 무언가 올려주며 그랬다.

"이 반지, 니가 좋아했던 거잖아."


커플링은 하고 싶은데 커플링을 하기는 싫다는 이상한 소릴 하며 내 엄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걸 빼 네 새끼 손가락에 끼워줬던 5000원 짜리 육각형 반지.
내가 젤 좋아하는 건데, 난 뭐 서울 올라가면 또 사면 되니까, 이거 끼고 있어, 하면서 나눠꼈던 나의 첫번째 커플링.
고향집에서부터 챙겨왔을 반지.
3일 내내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만지작 거리며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고민했을 그 반지.

용돈 따위 운운했던 내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또 이상한 말을 지껄였던 것 같다.
"이까진거 뭐라고..."

너는 웃으면서 잘 지내라고 인사했고
나는 네가 극장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부스 뒤에 숨어, 울었다.



3.
그래도 별다를 것 없는 연애였다.
남들만큼 특별하고 남들만큼 평이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헤어지고 나서 내가 진심을 담아 행복을 비는 유일한 친구라는 점이랄까.




4.
뭐 다른 점이랄게 혹시 있었나, 적다가 깨달았는데
그 친구랑 나는 별 공통점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는 문자도 전화도 싫어했다. 남자가 간지럽게 문자는 무슨, 이라면서.
나는 연락 횟수 이꼬르 관심의 척도라는 말을 속삭이는 사람들 때문에 친구에게 실망할 때도 있고 상처 받을 때도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 골수팬인 친구는 야구 경기를 볼 때 더더욱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나는 평생 야구 중계는 커녕 야구장에서도 야구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기아팬이었던 사람을 따라 야구장에 갔었는데 4회 초인가,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천취소 됐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야구장 방문이다.)
음악은 듣지 않는대서 음악 얘기를 할 수도 없었고 함께 영화를 본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영화쪽 일 하는 사람을 만나서 영화를 함께 본 적이 거의 없다.
요리사는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건가...)
인디포럼에선 나는 졸고 친구는 종일 영화만 봤다.
좋아하는 책도 달랐고, 나고 자란 곳도 달랐다.

근데, 그래도 그냥 재밌었다.
다른 건 다른가보다, 인정하고 존중해줬다.
나는 다른 게 좀 재밌엇다.
곰살맞은 말로 잦은 애정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맞잡은 손으로, 눈길로 살뜰한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떨어져 있어도 멀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 만난 사람들에게선 그런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의 모양도 다르니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연애를 기대하거나 소원하지 않는다.


그때만 가능한 일이었다면, 그렇기에 의미있는 일이겠지.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수 밖에. 구로니까 슬포하지마, 나의 여러분.






2017. 4. 17.

Captivated 2




What captivated me lately,


1.
늦은 밤의 다이너에 가보고 싶다는 너에게,
미국말곤 외국에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내 이야기는 전적으로 미국, 그것도 캘리포니아에 한정되어 있어. 그건 참고 해야 해.
거긴 24시간 하는 다이너(diner)나 중식집이 종종 있거든.
낮엔 정말 영 아니올시다인데, 새벽이나 이른 아침엔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어.

밤 늦게 먹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는 재미가 있지.



2.
악마의 증명
당신은 어느날 흰 깃털로 뒤덮혀 호수를 우아하게 부유하는 새를 발견했다.
긴 목에 주먹만한 얼굴, 짧지만 곧은 노란 부리가 귀엽다가도
날개를 펼치면 새하얀 새가 하늘을 뒤덮은 모양이 아름다워 '백조'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사람들은 그 뒤로 그런 모습을 가진 새를 '백조'라고 불렀는데,
백조 중에 다른 색 깃털을 가진 새도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다른 색의 백조를 찾아내면 그는 '하얗지 않은 백조도 있다'는 가설을 입증할 수 있다.
반면, 그런 백조는 '없다'고 반박하려는 당신은 아마 평생을 바쳐도 당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지켜내기 힘들 것이다.

물론 백조 중에 '흑조'가 존재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털의 색이 문제라면 부리의 색, 모양, 꼬리의 갯수 등으로 조건을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한 개의 증거만 발견해도 가능하지만
"없음"을 증명하는 일은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거나 혹은 정말 '없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걸 악마의 증명이라고 부른다. 정치인들이 청문회에서 자주 써먹는 방법이라고.



3.
로카르의 교환법칙.
접촉이 있었던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현대 과학수사의 기본이 되는 법칙으로 접촉 상태에 있던 사물들은 상호 간에 접촉의 증거를 남긴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차가 벽을 긁으면 차체에는 벽돌 자국이 나고 벽에는 차량의 페인트가 묻는다.

우리가 서로의 인생을 스쳐지나갈 때도,
아주 찰나이며 미미한 접촉이었다 해도,
흔적이 묻는다.

나는 너의 어디에 어떻게 묻었는가.



4.
Thomasson
Architectural relic (건축 유물) 라고 불리며 hyperart라고 분류된다.
건축물의 용도 변경 혹은 주변 환경의 변화로 초기의 목적과 상관없이 그 형태만 남은 건축을 일컫는 단어. 말보다 사진을 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평소에 이런 문, 계단, 손잡이 같은 걸 보면 꼭 다른 세계로 가는 다리같아서 좋아했는데 정식 용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런 것만 모아서 올리는 계정 만들고 싶다.




부치지 못할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만큼 슬픈 글이 또 있을까?



1.
안녕, g야. 네 본명을 쓰면 검색 될까봐 이렇게 비겁하게 서문을 여는 나를, 이해하지 ㅋㅋ?

g는 네가 집에서만 쓰는 이름이라고 했지.
친구들은 네 이름을 들으면 꼭 "그거 애칭이야? 아님 진짜 이름이야?" 하고 되물었어.
나는 사실 왜 평범한 이름은 집에서만 쓸까, 보다 왜 이름이 두 개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는데.

널 만날 땐 렌즈를 끼느라 눈이 늘 건조했고 같이 누워 만화책을 볼 때 세 번 압축한 안경을 꺼내 쓰면 못생겼다고 놀림 받기도 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만날 땐 스마트폰도 없었어. 믿어지니?

차비를 아끼려고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 다녀 오면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엔 꼬박 하루를 감기몸살처럼 앓았는데, 이젠 부산도 우스워.


니가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어서 나는 가슴이 괜히 뭉클하고, 뿌듯하고, 눈물이 왈칵 났어. 뭔지 모르겠다. 무슨 기분인지. 그냥, 네가 행복해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아. 이렇게 다시 감독과 관객으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너무 기쁘다. 진심이야. 네가 잘 하고 있어서 나는 너무 기뻐.


널 보면 또 이렇게 할마씨처럼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래도 너무 기쁘다. 그리고 고마워.



2.
장거리 연애같은 건 절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살을 부벼야 연애고 싸우면 꼭 얼굴 보고 화해해야 한다고 수학의 정석처럼 믿고 있었다. 법칙에 어긋나는 연애는 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혹은 할 줄 모를만큼 멍청했던 스물하고 다섯이었나, 넷이었나.

내가 생각보다 국내 여행을 좋아한다는 걸,  그 친구 덕분에 알았다. K는 좋은 곳이었다.
강아지를 "개새끼"라고 부르면서도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맥스와 로크 얘기를 할 때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던 친구. 강아지 이름을 존 로크에서 이름을 따왔다길래 나는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좋았더랬지.



3.
이젠 니가 서른 둘, 내가 서른이야. 
우리는 우리가 했던 농담처럼 살고 있어. 나는 큰 회사에 다니며 번역을 하고 너는 궂은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고. 그것도 믿어지니?

이 시간만 잘 보내면 꼭 뭐라도 될 것 같았다고, 내 세상 돌아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너를 돌아보지 못했구나, 내가 근시안적인 인간이었구나, 지금에서야 반성하지만
그때는 오늘이 올 줄 우리 둘 다 알았겠니? 아닌가, 너는 알고 있었으려나.

친구들은 아직도 이따금씩 네 얘기를 해. 주로 나를 놀리느라 니 이름을 꺼내지.
그럼 나는 여전히 당황해서 중언부언, 이상한 말을 해. 

너의 하고 많은 모습 중에서도 헤어지던 날 고개 숙이던 모습이 가장 뇌리에 깊게 박혀서일까.


친구들은 네가 계속 영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대. 다만 정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네. 나는, 나는, 네가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상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제 더는 내가 네 시나리오를 번역해줄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간, 어떤 스크린에서라도 우연히 네가 만든 화면과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텐데, 바랐거든.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나는 내 이 기쁜 맘을 전할 길이 없어서 눈이 벌개졌단다. 



늘 내 과거 속에만 살아있는 '그'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데,
오늘은 지금의 '너'에게 기쁜 마음으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

전하지 못한대도 괜찮아.

계속 영화 해줘. 이렇게 언제든 찾아볼게. 진심으로 기뻐하며 네 행복을 빌게.

축하해.




2017. 4. 16.




역시나 어려운 건
처음이 아니라 그 다음, 두번째였어.



2.
학부시절에 학교 커뮤니티에 '니모를 찾아서'라는 게시판이 있었다.
대충 어떤 인상착의의 사람을 어느 단대에서 봤는데, 혹시 그 분 어느 과인가요,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 있나요, 커피라도 건네드리면 싫어하실까요? 그런 글들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그럼 사람들은 다 같이 그 니모를 찾느라 혈안이 되는거지.

우리 과에서도 몇명 이름이 올라왔었는데,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간(...) 용의자(?)가 추려지고 이니셜이 등장하면 과실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지는거야.
당사자는 "에이, 무슨, 아니야." 하면서 수줍어하다가도 과실 모니터로 니모 게시판의 댓글창을 힐끗거렸어.


지금도 다들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가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2017. 4. 13.




치과 코디네이터 언니는 설명서에 자꾸 '2틀'만 참으라고 적는다.
이틀을 2틀로 쓰는 걸 보면 못견디겠다.
5섯가지도 그렇고...



2.
나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처음으로 대학 졸업장을 땄다.
외할머니는 서울로 유학을 와 숙대를 다니다 그만 두셨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알 방법은 없다. 그 외엔 대학을 간 사람이 없다. 아무도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소질이 없었다. 내 주변엔 공부나 진학 상담에 도움을 줄 어른이 없었다. 다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친척들은 명절이면 덕담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진심은 아니었다. 평생 공부로 스트레스 주거나 닥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는 되려 그게 무서웠다. 더 챙겨주면 좋겠는데, 더 시켜주면 좋겠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김 씨와 오 씨 피를 물려받은 사람인데, 결국 나도 저렇게 코앞만 보며 살진 않을까.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진짜면 어떡하지. 나도 그냥 그런 삶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삶을 우습다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살고 싶은 혹은 살 수 있는 종류의 삶은 아니었다.

나도 공부에 큰 뜻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이미 열두 살에 내 재능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살리에르겠구나.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열두 살이었다.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인문계엔 관심 없고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다고.
가정형편이 어렵다니 그럼 기술을 배우겠다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상고에 가겠다고.
엄마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 곧 한 번만 더 허튼 소리 해보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홧김에 엄마 몰래 선복수를 썼고 될 대로 되라지, 내 맘대로 하겠다, 해서 한 시간 거리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셈도 밝고 명석한 덕분에 중고등학교 모두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에선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상담을 해줬다.
수업시간에도 전 대학 갈 생각 없는데요, 하며 거들먹거렸다. 진심 60%, 방어기제 40%였다.
성적이 가장 잘 나왔을 땐 전교 3등이었는데, 그땐 집에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대가 무서웠다. 학교 시험이야 달달 외워서 보면 되는거였지만 모의고사는 달랐다. 이래선 어지간한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전공도 없는데 무작정 아무 대학, 아무 전공에 들어가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내적 갈등과 괴리감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모든 걸 혼자 충분히 살펴보고, 고민하고 결정하기에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시간도 경험도 모자랐다.

그 와중에도 미술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만 둔 건 내가 정말 빼어난 재능이 없는 걸 깨달아서인지 혹은 돈이 많이 든다니까 그냥 재능이 없는 척, 흥미가 사라진 척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에 늘 자조적이었다. 현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도망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같잖았고 내 인생이 가엽고 서글펐다. '내가 실은 형편없다는 걸 누가 알아채면 어쩌지? 나는 사실 정말 잘하고 싶은 건 잘 하지 못하는 애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그러다 이민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다같이 가는 건 어려우니 나부터 보내려고 했다. 애매한 시기였다. 고2 말, 추석쯤이었다 (그때 좋아했던 친구랑 추석 연휴에 이 얘길 나누다 엉엉 울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갈 생각도 없던 한국 대학이 갑자기 간절해져서는 수시 합격하고 나서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땐 너무 늦다고 했다. 그렇게 떠밀려 간 유학이었지만 자퇴하는 건 좋았다. 시스템에서 벗어난단 해방감도 있었지만 용기가 없던 내게 정당한 사유가 생겨서, 그게 내 등을 떠밀어줘서, 더이상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와 원망의 대상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고3 1학기 중간고사까진 보고 그만둔 것 같은데, 그때 마지막 석차가 전교 5등이었던가. 다들 내신 아까우니 팔고 가라고 했다. 그제서야 내 성적이 자랑스러웠다. 

미국에선 돈 걱정도, 부모 눈치도 덜 봐도 됐다. 그래서 다시 미대의 꿈을 키웠다. 가구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물론 마귀할멈 덕분에, 엄마 덕분에,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마지막 꿈.

한국으로 돌아온 동생과 나는 어찌저찌해서 결국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동생이 고3일 때, 엄마는 언니를 억지로 미국에 보내지 않았다면 연대도 충분히 갔을 거라며, 넌 언니 학교보다 낮은 데 갈 생각은 추호도 말라며, 겁을 줬댄다.

우리 학교가 뭐 어때서. 흥.

대학에서도 뭐가 됐든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영화제에 기웃거렸다.
그것도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그때 인연을 계기로 번역가의 이력이 시작됐다.


이젠 뭘 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안다. 28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면 난 우리집에서 최초로 석사학위를 딴 사람이 되겠지.

그 오랜 시간 스스로를 부정하고, 체념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모든 걸 혼자 결정해야 했고 
제 손으로 길을 닦아야 했다. 

정말이지 
엄마와, 가족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3.
그제 저녁 먹은 걸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못먹었으니까 48시간만에 식사를 했다.
죽을 원체 싫어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꿰맨 곳이 터질까봐 종일 입도 뻥긋 안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본죽에 들러서 쇠고기버섯죽을 시켰다.
혼자 죽을 떠먹는데, 서러워졌다. 궁상맞아 보였다. 그것도 수술인데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고, 밥은 챙겨먹었냐고, 싫어도 죽 먹으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다. 

아플 땐 아픈 것보다 아픈 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럽다.



4.
죽을 먹다 말고 결혼하고 싶어졌다.

툭하면 궁상맞게 서럽고 외로워져서, 서럽고 외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한다.
그래서 혼자라 서러울 그 누군가가 더는 서럽지 않도록,
잘 할 자신 있다.


아주 만나기만 해봐라, 아오.








우리는 평생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며 살아가는 존재.



1.
오늘 임플란트 했다.
태어나 처음 수술실에 들어가봤다. 꼬매본 것도 처음이었다.
무서워서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은 애 치곤 마취가 너무 잘 된 건지 중간에 잠들뻔 했다;

수술하고 나왔는데 국현이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전주 와?

+) 수술하고 나왔다고 했더니 하나님 만나고 왔냐고... 아옼ㅋㅋㅋㅋ



2.
몰랐는데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부산 갈 때 새 반스를 꺼내 신었는데 그걸 신고 엄청 돌아다녀서 그런가보다.



3.
통화로 밤 새느라 꾸벅꾸벅 조는 출근길이었으면 좋겠다.
해뜨는 게 아쉬운 통화 해본지 너무 오래 됐다.

살갗 부비는 것보다 그게 더 (희)귀하다.



4.
글이 점점 재미없어진다. 심각하다.
"보는 사람을 의식해서 그래요.ㅎㅎ" 맞아요, 맞아.



5.
사람을 만나면서 중요한 건 평상시에 얼마나 재미지게 지내냐보다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느냐인 것 같다.
싸움은 서로 어지간한 이해와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이상 '잘' 해결되기 어렵다.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연애는 늘 재밌게, 다양한 얘기로 싸울 수 있었던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잘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잘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지. 유연한 귀로, 공손한 혀로, 언제든 싸우고 또 껴안을 수 있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다.



2017. 4. 10.




내 기대수명이 한 달 가량 줄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글렀다.



2.
매일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잔다.
출근할 때도 듣고, 틈새 시간에도 듣는다.
이런 지 꽤 됐다. 이 팟캐스트가 한 회에 90-120분 정도 되는데, 벌써 150개 넘게 들었다.
두 번 들은 에피소드도 있다.

외로움이 속삭이는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에 쉽게 묻힌다.
라디오에서 귀를 떼지 못하다는 건 결국 지금 내가 못견디게 외롭다는 방증.




2017. 4. 6.

Leon Bridges






Leon Bridges, River





Leon Bridges, Coming Home




Miss Sloane





Let me, please, please, talk about my fear.



1.
Normal is overrrated.



2.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내내 여기에라도 다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만 살고 싶다고.
할 수만 있다면 피를 다 갈고 싶다고.
어느날 갑자기 짐을 싸들고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이국의 땅으로 떠나고 싶다고.
그곳에선 외로워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편이 낫겠다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꾸 하는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제발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가 
언젠가는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무섭다고.



3.
가족과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부부만 이혼 할 수 있게 해놓은 현재 시스템은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 친인척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문제를 묵과하고 있다.
1인 가정법 같은 거.



4.
원 톱, 여성 로비스트가 끌고 가는 영화이지만
상대방의 공격성 발언에도 여자라서 어쩌고 저쩌고는 없다.
두 번, 세 번 보고 영화를 생선 바르듯 발라서 여기서 뽑아 먹을 수 있는 모든 영양분을 쪽쪽 뽑아 먹고 싶다.
4월까지 본 영화 중에 젤 재밌다.




2017. 4. 5.




위로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괴로움을 나누자는 것도 아닌데,

힘들다고 말 할 수도, 왜 힘든지 설명할 수도 없다.
그냥 어깨정도면 좋겠다.

이렇게 웃고 허튼 소리, 실없는 소리를 하지만
사실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하고 한숨 한번만 크게 쉬게.



2.
니 여자친구를 봤어.
몰랐던 것도 아니고, 얼굴을 알든 모르든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실존하는 사람이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됐어.

니넨 언제나 마음껏, 순수한 의도로, 아무렇게나 할 수 있어서 좋겠다.



3.
모르는 건 죄야.
무지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니까, 결국 모르면 죄야.



4.
힘들면 잠깐 쉬어가, 라든지
어려운 건 돌아가, 라는 조언을 듣지 않는다.
머리도 식힐 겸 여행 좀 다녀와, 하는 건 진짜 이해 불가...

나는 정면돌파하는 스타일이다. 힘들수록 빨리, 직면해서, 뚫고 지나가는 방법을 택한다.
힘을 쓰다 중간에 잠시 템포를 끊고 다시 출발하려면 처음보다 배는 힘들다.
운동하다 보면 오감으로 알 수 있다.
힘들 수록 생각같은 거, 전략같은 거 짜지 말고 그냥 닥치고 일단 끝내는 게 낫다.
아니면 정말 다 때려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쉬다 말고 '포기하면 편해'라는 안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역시 포기해야겠다,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내가 지금 졸라 힘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