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7.

부치지 못할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만큼 슬픈 글이 또 있을까?



1.
안녕, g야. 네 본명을 쓰면 검색 될까봐 이렇게 비겁하게 서문을 여는 나를, 이해하지 ㅋㅋ?

g는 네가 집에서만 쓰는 이름이라고 했지.
친구들은 네 이름을 들으면 꼭 "그거 애칭이야? 아님 진짜 이름이야?" 하고 되물었어.
나는 사실 왜 평범한 이름은 집에서만 쓸까, 보다 왜 이름이 두 개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는데.

널 만날 땐 렌즈를 끼느라 눈이 늘 건조했고 같이 누워 만화책을 볼 때 세 번 압축한 안경을 꺼내 쓰면 못생겼다고 놀림 받기도 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만날 땐 스마트폰도 없었어. 믿어지니?

차비를 아끼려고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 다녀 오면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엔 꼬박 하루를 감기몸살처럼 앓았는데, 이젠 부산도 우스워.


니가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어서 나는 가슴이 괜히 뭉클하고, 뿌듯하고, 눈물이 왈칵 났어. 뭔지 모르겠다. 무슨 기분인지. 그냥, 네가 행복해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아. 이렇게 다시 감독과 관객으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너무 기쁘다. 진심이야. 네가 잘 하고 있어서 나는 너무 기뻐.


널 보면 또 이렇게 할마씨처럼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래도 너무 기쁘다. 그리고 고마워.



2.
장거리 연애같은 건 절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살을 부벼야 연애고 싸우면 꼭 얼굴 보고 화해해야 한다고 수학의 정석처럼 믿고 있었다. 법칙에 어긋나는 연애는 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혹은 할 줄 모를만큼 멍청했던 스물하고 다섯이었나, 넷이었나.

내가 생각보다 국내 여행을 좋아한다는 걸,  그 친구 덕분에 알았다. K는 좋은 곳이었다.
강아지를 "개새끼"라고 부르면서도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맥스와 로크 얘기를 할 때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던 친구. 강아지 이름을 존 로크에서 이름을 따왔다길래 나는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좋았더랬지.



3.
이젠 니가 서른 둘, 내가 서른이야. 
우리는 우리가 했던 농담처럼 살고 있어. 나는 큰 회사에 다니며 번역을 하고 너는 궂은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고. 그것도 믿어지니?

이 시간만 잘 보내면 꼭 뭐라도 될 것 같았다고, 내 세상 돌아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너를 돌아보지 못했구나, 내가 근시안적인 인간이었구나, 지금에서야 반성하지만
그때는 오늘이 올 줄 우리 둘 다 알았겠니? 아닌가, 너는 알고 있었으려나.

친구들은 아직도 이따금씩 네 얘기를 해. 주로 나를 놀리느라 니 이름을 꺼내지.
그럼 나는 여전히 당황해서 중언부언, 이상한 말을 해. 

너의 하고 많은 모습 중에서도 헤어지던 날 고개 숙이던 모습이 가장 뇌리에 깊게 박혀서일까.


친구들은 네가 계속 영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대. 다만 정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네. 나는, 나는, 네가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상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제 더는 내가 네 시나리오를 번역해줄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간, 어떤 스크린에서라도 우연히 네가 만든 화면과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텐데, 바랐거든.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나는 내 이 기쁜 맘을 전할 길이 없어서 눈이 벌개졌단다. 



늘 내 과거 속에만 살아있는 '그'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데,
오늘은 지금의 '너'에게 기쁜 마음으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

전하지 못한대도 괜찮아.

계속 영화 해줘. 이렇게 언제든 찾아볼게. 진심으로 기뻐하며 네 행복을 빌게.

축하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