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3.




치과 코디네이터 언니는 설명서에 자꾸 '2틀'만 참으라고 적는다.
이틀을 2틀로 쓰는 걸 보면 못견디겠다.
5섯가지도 그렇고...



2.
나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처음으로 대학 졸업장을 땄다.
외할머니는 서울로 유학을 와 숙대를 다니다 그만 두셨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알 방법은 없다. 그 외엔 대학을 간 사람이 없다. 아무도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소질이 없었다. 내 주변엔 공부나 진학 상담에 도움을 줄 어른이 없었다. 다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친척들은 명절이면 덕담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진심은 아니었다. 평생 공부로 스트레스 주거나 닥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는 되려 그게 무서웠다. 더 챙겨주면 좋겠는데, 더 시켜주면 좋겠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김 씨와 오 씨 피를 물려받은 사람인데, 결국 나도 저렇게 코앞만 보며 살진 않을까.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진짜면 어떡하지. 나도 그냥 그런 삶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삶을 우습다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살고 싶은 혹은 살 수 있는 종류의 삶은 아니었다.

나도 공부에 큰 뜻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이미 열두 살에 내 재능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살리에르겠구나.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열두 살이었다.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인문계엔 관심 없고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다고.
가정형편이 어렵다니 그럼 기술을 배우겠다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상고에 가겠다고.
엄마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 곧 한 번만 더 허튼 소리 해보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홧김에 엄마 몰래 선복수를 썼고 될 대로 되라지, 내 맘대로 하겠다, 해서 한 시간 거리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셈도 밝고 명석한 덕분에 중고등학교 모두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에선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상담을 해줬다.
수업시간에도 전 대학 갈 생각 없는데요, 하며 거들먹거렸다. 진심 60%, 방어기제 40%였다.
성적이 가장 잘 나왔을 땐 전교 3등이었는데, 그땐 집에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대가 무서웠다. 학교 시험이야 달달 외워서 보면 되는거였지만 모의고사는 달랐다. 이래선 어지간한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전공도 없는데 무작정 아무 대학, 아무 전공에 들어가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내적 갈등과 괴리감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모든 걸 혼자 충분히 살펴보고, 고민하고 결정하기에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시간도 경험도 모자랐다.

그 와중에도 미술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만 둔 건 내가 정말 빼어난 재능이 없는 걸 깨달아서인지 혹은 돈이 많이 든다니까 그냥 재능이 없는 척, 흥미가 사라진 척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에 늘 자조적이었다. 현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도망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같잖았고 내 인생이 가엽고 서글펐다. '내가 실은 형편없다는 걸 누가 알아채면 어쩌지? 나는 사실 정말 잘하고 싶은 건 잘 하지 못하는 애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그러다 이민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다같이 가는 건 어려우니 나부터 보내려고 했다. 애매한 시기였다. 고2 말, 추석쯤이었다 (그때 좋아했던 친구랑 추석 연휴에 이 얘길 나누다 엉엉 울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갈 생각도 없던 한국 대학이 갑자기 간절해져서는 수시 합격하고 나서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땐 너무 늦다고 했다. 그렇게 떠밀려 간 유학이었지만 자퇴하는 건 좋았다. 시스템에서 벗어난단 해방감도 있었지만 용기가 없던 내게 정당한 사유가 생겨서, 그게 내 등을 떠밀어줘서, 더이상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와 원망의 대상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고3 1학기 중간고사까진 보고 그만둔 것 같은데, 그때 마지막 석차가 전교 5등이었던가. 다들 내신 아까우니 팔고 가라고 했다. 그제서야 내 성적이 자랑스러웠다. 

미국에선 돈 걱정도, 부모 눈치도 덜 봐도 됐다. 그래서 다시 미대의 꿈을 키웠다. 가구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물론 마귀할멈 덕분에, 엄마 덕분에,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마지막 꿈.

한국으로 돌아온 동생과 나는 어찌저찌해서 결국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동생이 고3일 때, 엄마는 언니를 억지로 미국에 보내지 않았다면 연대도 충분히 갔을 거라며, 넌 언니 학교보다 낮은 데 갈 생각은 추호도 말라며, 겁을 줬댄다.

우리 학교가 뭐 어때서. 흥.

대학에서도 뭐가 됐든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영화제에 기웃거렸다.
그것도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그때 인연을 계기로 번역가의 이력이 시작됐다.


이젠 뭘 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안다. 28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면 난 우리집에서 최초로 석사학위를 딴 사람이 되겠지.

그 오랜 시간 스스로를 부정하고, 체념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모든 걸 혼자 결정해야 했고 
제 손으로 길을 닦아야 했다. 

정말이지 
엄마와, 가족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3.
그제 저녁 먹은 걸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못먹었으니까 48시간만에 식사를 했다.
죽을 원체 싫어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꿰맨 곳이 터질까봐 종일 입도 뻥긋 안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본죽에 들러서 쇠고기버섯죽을 시켰다.
혼자 죽을 떠먹는데, 서러워졌다. 궁상맞아 보였다. 그것도 수술인데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고, 밥은 챙겨먹었냐고, 싫어도 죽 먹으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다. 

아플 땐 아픈 것보다 아픈 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럽다.



4.
죽을 먹다 말고 결혼하고 싶어졌다.

툭하면 궁상맞게 서럽고 외로워져서, 서럽고 외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한다.
그래서 혼자라 서러울 그 누군가가 더는 서럽지 않도록,
잘 할 자신 있다.


아주 만나기만 해봐라, 아오.





댓글 2개:

  1. 요건 좀 서글프군. 처음으로 들어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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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니리니 서리니 이런 아이디도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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