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코디네이터 언니는 설명서에 자꾸 '2틀'만 참으라고 적는다.
이틀을 2틀로 쓰는 걸 보면 못견디겠다.
5섯가지도 그렇고...
2.
나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처음으로 대학 졸업장을 땄다.
외할머니는 서울로 유학을 와 숙대를 다니다 그만 두셨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알 방법은 없다. 그 외엔 대학을 간 사람이 없다. 아무도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소질이 없었다. 내 주변엔 공부나 진학 상담에 도움을 줄 어른이 없었다. 다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친척들은 명절이면 덕담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진심은 아니었다. 평생 공부로 스트레스 주거나 닥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는 되려 그게 무서웠다. 더 챙겨주면 좋겠는데, 더 시켜주면 좋겠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김 씨와 오 씨 피를 물려받은 사람인데, 결국 나도 저렇게 코앞만 보며 살진 않을까.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진짜면 어떡하지. 나도 그냥 그런 삶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삶을 우습다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살고 싶은 혹은 살 수 있는 종류의 삶은 아니었다.
나도 공부에 큰 뜻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이미 열두 살에 내 재능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살리에르겠구나.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열두 살이었다.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인문계엔 관심 없고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다고.
가정형편이 어렵다니 그럼 기술을 배우겠다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상고에 가겠다고.
엄마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 곧 한 번만 더 허튼 소리 해보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홧김에 엄마 몰래 선복수를 썼고 될 대로 되라지, 내 맘대로 하겠다, 해서 한 시간 거리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셈도 밝고 명석한 덕분에 중고등학교 모두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에선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상담을 해줬다.
수업시간에도 전 대학 갈 생각 없는데요, 하며 거들먹거렸다. 진심 60%, 방어기제 40%였다.
성적이 가장 잘 나왔을 땐 전교 3등이었는데, 그땐 집에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대가 무서웠다. 학교 시험이야 달달 외워서 보면 되는거였지만 모의고사는 달랐다. 이래선 어지간한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전공도 없는데 무작정 아무 대학, 아무 전공에 들어가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내적 갈등과 괴리감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모든 걸 혼자 충분히 살펴보고, 고민하고 결정하기에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시간도 경험도 모자랐다.
그 와중에도 미술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만 둔 건 내가 정말 빼어난 재능이 없는 걸 깨달아서인지 혹은 돈이 많이 든다니까 그냥 재능이 없는 척, 흥미가 사라진 척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에 늘 자조적이었다. 현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도망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같잖았고 내 인생이 가엽고 서글펐다. '내가 실은 형편없다는 걸 누가 알아채면 어쩌지? 나는 사실 정말 잘하고 싶은 건 잘 하지 못하는 애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그러다 이민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다같이 가는 건 어려우니 나부터 보내려고 했다. 애매한 시기였다. 고2 말, 추석쯤이었다 (그때 좋아했던 친구랑 추석 연휴에 이 얘길 나누다 엉엉 울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갈 생각도 없던 한국 대학이 갑자기 간절해져서는 수시 합격하고 나서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땐 너무 늦다고 했다. 그렇게 떠밀려 간 유학이었지만 자퇴하는 건 좋았다. 시스템에서 벗어난단 해방감도 있었지만 용기가 없던 내게 정당한 사유가 생겨서, 그게 내 등을 떠밀어줘서, 더이상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와 원망의 대상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고3 1학기 중간고사까진 보고 그만둔 것 같은데, 그때 마지막 석차가 전교 5등이었던가. 다들 내신 아까우니 팔고 가라고 했다. 그제서야 내 성적이 자랑스러웠다.
미국에선 돈 걱정도, 부모 눈치도 덜 봐도 됐다. 그래서 다시 미대의 꿈을 키웠다. 가구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물론 마귀할멈 덕분에, 엄마 덕분에,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마지막 꿈.
나중에 들은 얘긴데, 동생이 고3일 때, 엄마는 언니를 억지로 미국에 보내지 않았다면 연대도 충분히 갔을 거라며, 넌 언니 학교보다 낮은 데 갈 생각은 추호도 말라며, 겁을 줬댄다.
우리 학교가 뭐 어때서. 흥.
대학에서도 뭐가 됐든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영화제에 기웃거렸다.
그것도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그때 인연을 계기로 번역가의 이력이 시작됐다.
이젠 뭘 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안다. 28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면 난 우리집에서 최초로 석사학위를 딴 사람이 되겠지.
그 오랜 시간 스스로를 부정하고, 체념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모든 걸 혼자 결정해야 했고
제 손으로 길을 닦아야 했다.
정말이지
엄마와, 가족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3.
그제 저녁 먹은 걸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못먹었으니까 48시간만에 식사를 했다.
죽을 원체 싫어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꿰맨 곳이 터질까봐 종일 입도 뻥긋 안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본죽에 들러서 쇠고기버섯죽을 시켰다.
혼자 죽을 떠먹는데, 서러워졌다. 궁상맞아 보였다. 그것도 수술인데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고, 밥은 챙겨먹었냐고, 싫어도 죽 먹으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다.
아플 땐 아픈 것보다 아픈 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럽다.
4.
죽을 먹다 말고 결혼하고 싶어졌다.
툭하면 궁상맞게 서럽고 외로워져서, 서럽고 외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한다.
그래서 혼자라 서러울 그 누군가가 더는 서럽지 않도록,
잘 할 자신 있다.
아주 만나기만 해봐라, 아오.
요건 좀 서글프군. 처음으로 들어와봄.
답글삭제리니리니 서리니 이런 아이디도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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