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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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 치면서
...
2-3.
1.
너희 집에 딱히 튤립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2.
주말에 깨를 만나서 해명의 시간을 가졌다.
깨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을지, 어떤 소용이랄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정신과에서 자주 하는 말이 어떠한 감정에 빠져들 때에는 거기서 잠시 거리를 두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름 붙여보라는 조언인데, 지난 일주일은 그 조언을 실천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왜 혼란스럽지, 뭐가 문제지, 그때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지, 등등.
거시적 바라보기에 서투른 탓에 한 가지에 쉽게 꽂히는 편이고, (특히나 갈등상황에서는) 나를 충분히 혹은 포괄적으로 설명하거나 바로잡지 못하는데, 안타깝게도 관계 초기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관계가 그대로 종료되기 십상이다. 생각 중독인 나는 그럼 유배당한 학자처럼 아무도 묻지 않은 것에 관해 혼자 골몰한다. 기껏 연구한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표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동료도 청중도 없이, 초대받지 못한 연설가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발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깨는 언제나처럼 표정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우선, 그 다음으로는, 셋째, 이게 마지막인데 세번째, 하며 머릿속에 준비해온 발표자료를 읊는다. 깨는 딱히 어떤 반응을 하지 않는다. 나를 끝까지 응시하고 내 말이 끝나면 소화의 시간을 갖는다. 어느 정도 정적이 흐르고, 마가 뜨는 걸 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교수님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예비 박사생처럼 조금 초조해진다. 성미가 급한 초조함이 제 풀에 지칠 때쯤 깨가 입을 연다. 내가 오해를 일으킨 부분에 대해,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 그것을 감지했다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 짧은 감상을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이 나를 긴장시킨다.
가끔 깨와 눈이 마주치면 그의 시선에 밀린다. 누구와 눈 맞추다 고개 돌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깨와 마주 앉아 있을 때에는 시선이 길을 잃는다. 그 눈으로 자꾸 무언가 물어대는 것 같다. 내 속을 꿰뚫어보는 듯 매섭다는 생각에 부끄러울 때도 있고, 이제 갓 문자를 배웠을 뿐인 외국어 고문서를 읽는 것처럼 당혹스럽거나 난처한 기분일 때도 있다. <<컨택트>>처럼. 그런 응시도 데이빗과 훈련한 것일까. 어떻게 그런 눈일 수 있지.
일전에도 비슷한 눈을 본 적이 있었는지 머릿속 캐비넷을 뒤진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파일들은 인덱스의 색이 바래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다.
깨가 해준 이야기들을 까먹을세라 인상 깊었던 순서로 복기한다. 나는 깨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깨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어떠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주제를 꺼낸다. 거기에 대꾸를 하다보면 나의 빈틈을 보이고야만다. 허술함을 들켰다는 생각에 민망해진다. 눈길로, 단어로, 자꾸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치를 즐긴다. 부끄럽고 싶다. 낯간지럽고 싶다. 간지럽다. 틈새로, 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깨에게는 자꾸 뜬금 없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너는 다른 것을 건축하고 싶지는 않니? 그것은 무엇이니?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니? 두렵기는 하니?
네 속에는 무엇이 들어앉아 있니? 얼마나 더 들어있니?
섬세하고 영민한 사람.
어쨋든 깨는 설화 속에 나오는 잼얘 할아버지 같다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 보따리에서 잼얘를 한 번에 하나씩만 꺼내 보여준다. 끝내주는 러프타임 뒤에 항상 맛있는 걸 먹여준다. 물론 계산은 각자. 짐들기도 각자. 자신의 몫은 자신이 책임지기.
하지만 관계는 팀플.
3.
하나 바란다면, 나와의 관계를 열린 결말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것.
시간이 지나보아야 알 일이지만.
이제는 전혀 원하지 않는다.
감독님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21년이더라.
그 뒤로 단 한 번도 카톡창을 열어보지 않았다. 의식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이미 마지막 막남을 약속했을 즈음에 그 대화창은 마지막 챕터를 닫다 못해 감사의 말까지 마무리지은 후 였기에 졸업 후 다시는 열어보지 않는 졸업논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최근 그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를 누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어떤 공통점 때문에 그때가 떠올랐는고 하니, 사람보다는 그와의 관계의 흐름이나 그 속에서 나눈 대화가 그때의 우리를 퍽 닮았었다. 독점욕 같은 건 없어보이는 성향하며, 나와 연애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그러면서도 무슨 미련인지 나를 집에는 보내지 않는 모순적 태도. 그리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더라도 (최선을 다해 지루함을 감추며) 경청하는 눈빛.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그와 너무나 닮았다. 내가 침대에 누워 마르크스나, 아니 에르노와 필립 빌랭의 비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에 대한 썰을 풀어도 우선은 경청하는 그 모습. 그 얘기를 꺼내도 될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배려. 너무나 귀하고 갈망했던 무대. 감독님이 나에게 내주었던 콜로세움 한 가운데에 다시 선 기분이었다. 그게 너무 귀해서, 재미없어 하는 걸 보면서도,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쇼를 이어나가야 하는 스탠드업 코메디언처럼 멈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 중에 뭐라도 하나는 재미있겠지, 그런 심정으로.
어쨋든, 미용실에 앉아 원고 주제를 구상하다 문득 감독님과의 대화창이 생각났다. 그리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대화창을 올려다보고는 눈물이 핑 돌 만큼 다정했던 그 사람의 메시지들에 조금 놀랐다. 내 기억보다 더 다정하고 살뜰하게 나를 살펴주고 배려해줬다. 내가 동굴 속을 헤맬 때면 가장 필요할 때에 가장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퍼주었다. 내가 자길 너무나 미워하고 원망하며 저주한다는 글을 썼을 때에도, 나를 위해 그 글을 그대로 세상에 내보이게 했다. 글과 별개로 내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며 내가 있는 곳까지 와 새벽까지 내 울분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화해를 청했다.
그런 정성과 성품을 사는 동안 내가 또 누구에게 기대하겠는가.
정말이지 나의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의 스승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감독님, 저 올해 안에는 두 번째 책 내려고요. 퇴고 중이에요. 회사도 잠시 쉬고요. 제 것을 못하니 몸과 마음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네요.
감독님 소식, 아주 간간이 들어요. 저는 여전히 헤매면서 잘 지내요. 얼마 전에는 동빙고에 다녀왔어요. 무더위라 죽은 못 먹었지만 팥빙수는 씩씩하게, 야무지게 싹싹 비우고 왔어요. 감독님과 처음 간 후로 사실 한 번도 가지 못했거든요.
괄호 속 사랑에 대한 에세이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 사랑에 관해서는 더 쓸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저 뭐하고 사나 궁금하신지, 그것은 궁금해요. 감독님도 제 생각이 나실 때가 있을까요?
감독님 안부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런 호기심만 품는 속좁은 저를 오래도록 떠올려주세요. 궁금해해주세요.
코드 쓰는 일, 기계어에 대한 이야기, 이런 거 너무 하고 싶은데, 이제는 제가 연락할 핑계거리가 하나도 없어서요. 학교를 다시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다시 가고 싶긴 해요. 다른 전공으로).
여기에나 이렇게 적어요.
저 그럼 원고 마무리하러 가볼게요.
1.
어제도 결국 양질의 잠을 자진 못했다. 꿈에는 건태가 나왔다. 정확하게는 건태와 통화를 하는 꿈이었다. 건태는 전화를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며 너무 미안하다고 울었고, 나는 정색하며 냉랭한 목소리로 단답을 해 건태에게 비수를 꽂았다. (하지만 그럴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괜히 건태에게 미안해서 이따 문자 한 통 하려고. 우리 소중한 건태, 내 자존감 지킴이인데.
2.
건태는 내가 건태를 건태라고 부르는 게 내내 웃기다고 했다 (건태는 나보다 네 살 위다). 그렇담 오빠라 불러주랴 물으면 그건 또 아니란다.
서른이 넘기 전까지는 줄곧 연상만 만났지만 단 한 명도 오빠라 부르지 않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나도 나를 누나라 부르기 바라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연 씨라 불리기를 좋아하고, 애정의 대상은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른다.
보고 싶다는 마음도, 염려도, 감사도, 모두 이름에 담는다.
2-2.
내가 그래서 아직 너의 이름을 잘 부르지 못 해.
3.
서래 씨,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하는 경우가 잦지만
저는 그런 사람은 못 되었던 것 같아요. 사랑이란 관계의 이름은 아니니까요.
늦었지만 서래 씨의 통찰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4.
생각이 많으니 역시 블로그만한 게 없네.
5.
나의 사랑 넷플릭스 시리즈 <<마인드 헌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Love is violence; sex is violence. Every interaction is violence. It's just a matter of scale. ... does it feel good when your lover takes your hand and you didn't expect it? Does it feel better when he grabs your nipples? (or) twist them?"
SM 플레이 후 상대를 살해한 범죄자의 대사이나, 그의 말에 일부 동의하는 바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SM의 정의이다. 합의된 복종과 통제, 자유의지와 존엄성을 타인의 손에 넘겨주는 일은 사랑의 표현, 그 영역의 확장이자 도구일 때에만 성립가능하다. 가학과 피학의 관계에서 신뢰와 애정은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 걸린 것이 목숨만큼 크거든.
6.
첫 책에는 이스터 에그처럼 나의 성향에 대한 글귀를 남겨놓았다. 누군가 발견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를 들키(어 얼굴 붉히)고 싶다는 욕망은 왜 이 영역으로까지 나대는 것인지.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후기는 듣지 못했다.
7.
내 것을 쓰지 않았다고 병이 나는걸 보면 나도 천성 창작자의 피가 흐르나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