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9.

팀플

 



1.

너희 집에 딱히 튤립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2.

주말에 깨를 만나서 해명의 시간을 가졌다.

깨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을지, 어떤 소용이랄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정신과에서 자주 하는 말이 어떠한 감정에 빠져들 때에는 거기서 잠시 거리를 두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름 붙여보라는 조언인데, 지난 일주일은 그 조언을 실천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왜 혼란스럽지, 뭐가 문제지, 그때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지, 등등.

거시적 바라보기에 서투른 탓에 한 가지에 쉽게 꽂히는 편이고, (특히나 갈등상황에서는) 나를 충분히 혹은 포괄적으로 설명하거나 바로잡지 못하는데, 안타깝게도 관계 초기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관계가 그대로 종료되기 십상이다. 생각 중독인 나는 그럼 유배당한 학자처럼 아무도 묻지 않은 것에 관해 혼자 골몰한다. 기껏 연구한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표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동료도 청중도 없이, 초대받지 못한 연설가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발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깨는 언제나처럼 표정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우선, 그 다음으로는, 셋째, 이게 마지막인데 세번째, 하며 머릿속에 준비해온 발표자료를 읊는다. 깨는 딱히 어떤 반응을 하지 않는다. 나를 끝까지 응시하고 내 말이 끝나면 소화의 시간을 갖는다. 어느 정도 정적이 흐르고, 마가 뜨는 걸 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교수님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예비 박사생처럼 조금 초조해진다. 성미가 급한 초조함이 제 풀에 지칠 때쯤 깨가 입을 연다. 내가 오해를 일으킨 부분에 대해,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 그것을 감지했다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 짧은 감상을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이 나를 긴장시킨다. 

가끔 깨와 눈이 마주치면 그의 시선에 밀린다. 누구와 눈 맞추다 고개 돌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깨와 마주 앉아 있을 때에는 시선이 길을 잃는다. 그 눈으로 자꾸 무언가 물어대는 것 같다. 내 속을 꿰뚫어보는 듯 매섭다는 생각에 부끄러울 때도 있고, 이제 갓 문자를 배웠을 뿐인 외국어 고문서를 읽는 것처럼 당혹스럽거나 난처한 기분일 때도 있다. <<컨택트>>처럼. 그런 응시도 데이빗과 훈련한 것일까. 어떻게 그런 눈일 수 있지.

일전에도 비슷한 눈을 본 적이 있었는지 머릿속 캐비넷을 뒤진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파일들은 인덱스의 색이 바래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다.


깨가 해준 이야기들을 까먹을세라 인상 깊었던 순서로 복기한다. 나는 깨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깨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어떠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주제를 꺼낸다. 거기에 대꾸를 하다보면 나의 빈틈을 보이고야만다. 허술함을 들켰다는 생각에 민망해진다. 눈길로, 단어로, 자꾸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치를 즐긴다. 부끄럽고 싶다. 낯간지럽고 싶다. 간지럽다. 틈새로, 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깨에게는 자꾸 뜬금 없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너는 다른 것을 건축하고 싶지는 않니? 그것은 무엇이니?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니? 두렵기는 하니?

네 속에는 무엇이 들어앉아 있니? 얼마나 더 들어있니?




섬세하고 영민한 사람.


어쨋든 깨는 설화 속에 나오는 잼얘 할아버지 같다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 보따리에서 잼얘를 한 번에 하나씩만 꺼내 보여준다. 끝내주는 러프타임 뒤에 항상 맛있는 걸 먹여준다. 물론 계산은 각자. 짐들기도 각자. 자신의 몫은 자신이 책임지기. 

하지만 관계는 팀플.




3.

하나 바란다면, 나와의 관계를 열린 결말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것.

시간이 지나보아야 알 일이지만.

이제는 전혀 원하지 않는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