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21년이더라.
그 뒤로 단 한 번도 카톡창을 열어보지 않았다. 의식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이미 마지막 막남을 약속했을 즈음에 그 대화창은 마지막 챕터를 닫다 못해 감사의 말까지 마무리지은 후 였기에 졸업 후 다시는 열어보지 않는 졸업논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최근 그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를 누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어떤 공통점 때문에 그때가 떠올랐는고 하니, 사람보다는 그와의 관계의 흐름이나 그 속에서 나눈 대화가 그때의 우리를 퍽 닮았었다. 독점욕 같은 건 없어보이는 성향하며, 나와 연애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그러면서도 무슨 미련인지 나를 집에는 보내지 않는 모순적 태도. 그리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더라도 (최선을 다해 지루함을 감추며) 경청하는 눈빛.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그와 너무나 닮았다. 내가 침대에 누워 마르크스나, 아니 에르노와 필립 빌랭의 비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에 대한 썰을 풀어도 우선은 경청하는 그 모습. 그 얘기를 꺼내도 될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배려. 너무나 귀하고 갈망했던 무대. 감독님이 나에게 내주었던 콜로세움 한 가운데에 다시 선 기분이었다. 그게 너무 귀해서, 재미없어 하는 걸 보면서도,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쇼를 이어나가야 하는 스탠드업 코메디언처럼 멈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 중에 뭐라도 하나는 재미있겠지, 그런 심정으로.
어쨋든, 미용실에 앉아 원고 주제를 구상하다 문득 감독님과의 대화창이 생각났다. 그리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대화창을 올려다보고는 눈물이 핑 돌 만큼 다정했던 그 사람의 메시지들에 조금 놀랐다. 내 기억보다 더 다정하고 살뜰하게 나를 살펴주고 배려해줬다. 내가 동굴 속을 헤맬 때면 가장 필요할 때에 가장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퍼주었다. 내가 자길 너무나 미워하고 원망하며 저주한다는 글을 썼을 때에도, 나를 위해 그 글을 그대로 세상에 내보이게 했다. 글과 별개로 내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며 내가 있는 곳까지 와 새벽까지 내 울분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화해를 청했다.
그런 정성과 성품을 사는 동안 내가 또 누구에게 기대하겠는가.
정말이지 나의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의 스승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감독님, 저 올해 안에는 두 번째 책 내려고요. 퇴고 중이에요. 회사도 잠시 쉬고요. 제 것을 못하니 몸과 마음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네요.
감독님 소식, 아주 간간이 들어요. 저는 여전히 헤매면서 잘 지내요. 얼마 전에는 동빙고에 다녀왔어요. 무더위라 죽은 못 먹었지만 팥빙수는 씩씩하게, 야무지게 싹싹 비우고 왔어요. 감독님과 처음 간 후로 사실 한 번도 가지 못했거든요.
괄호 속 사랑에 대한 에세이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 사랑에 관해서는 더 쓸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저 뭐하고 사나 궁금하신지, 그것은 궁금해요. 감독님도 제 생각이 나실 때가 있을까요?
감독님 안부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런 호기심만 품는 속좁은 저를 오래도록 떠올려주세요. 궁금해해주세요.
코드 쓰는 일, 기계어에 대한 이야기, 이런 거 너무 하고 싶은데, 이제는 제가 연락할 핑계거리가 하나도 없어서요. 학교를 다시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다시 가고 싶긴 해요. 다른 전공으로).
여기에나 이렇게 적어요.
저 그럼 원고 마무리하러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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