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31.





그날 도현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보고서 제출일을 맞추느라 주말 내내 일을 해서인지 월요일부터 유난히 피곤했는데도 도현의 생체시계는 반응이 늦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 앉는데도 뇌가 꺼지지 않았다. 도현은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을 대신해 머릿속에 있을 종료버튼을 눌러주고 싶었다. 수요일이 되서야 그간 밀린 피로가 도미노처럼 도현을 톡 하고 쓰러트렸다. 
도현의 주중 스케줄은 늘 비슷했다. 퇴근 후 늦은 저녁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잠시 스트레칭 하다 샤워를 했다. 매일 아침 조금이라도 더 잘 요량으로 머리는 늘 밤에 감았다.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까지 나와 TV를 켰다. TV를 틀었을 때 나오는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루가 한 시간 쯤 남은 시점에서 알게 되니 유효기간 한 시간짜리 정보였다. 도현이 즐겨보는 토크쇼라도 하는 날엔 자정이 한참 넘어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정신차리면 핸드폰 속 시계는 새벽 한 시. 이깟 예능이 뭐라고, 좀 더 일찍 누울 걸, 후회가 밀려올 때쯤이면 새벽 한 시 반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대충 세수만 했다. 조금만 누워있다 밥 먹고 샤워해야겠다, 생각하며 누웠는데 전화벨소리가 날 때서야 까무룩 잠들었다는 걸 알았다. 
발신자 이름을 보고 긴가 민가했다. 바로 이름 위에 작게 뜬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 시. 핸드폰 화면을 뒤집고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은 참 안 변하는구나, 헛웃음이 났다. 핸드폰 화면을 돌려 통화버튼을 눌렀다.

- 도현쓰.

전화기 너머 불콰하게 취한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 현욱쓰.

도현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상대방이 어색해하거나 대화 중간에 마가 뜨면 몸 둘 바를 모르는 성격이었다. 필요 없는 얘기, 쓸 데 없는 얘기, 제 살 깎아먹는 얘기를 해서라도 상대를 웃게 만들어야 마음이 편했다. 안 친한 사이에선 유독 그랬다. 낯선 사람 앞에선 유난히 티 없는 애처럼 맑게 웃고 떠들었다. 도현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칭찬하면 눈매가 휘어지도록 싱긋 거리면서도 속으론 '서비스용 미소입니다' 하고 자조했다. 그 새벽, 그 깜깜한 방안에서 도현은 핸드폰 너머의 사람에게까지 환한 잇몸 미소를 띄웠다.
현욱은 마지막 대화가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연락이 없던 사람이었다. 도현과 현욱의 친구들이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불러내 두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일종의 소개팅이었다. 다만 그날 감자탕집에 모인 여섯 명 중 도현과 현욱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가 주선자였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달까. 도현과 현욱은 그날 처음 만났고, 정확히 반 년 뒤 두번째 만남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아마 도현은 몇 번 문자를 넣었을 거다. 그리고 현욱은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했겠지. 

그렇게 따져보니 1년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2017. 12. 27.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





1번은 내가 한 통역 녹음해서 들어보기.
2번은 내가 한 번역 시간 지나고 다시 보기. 너 막, 어, 응, 어쩌려고, 엉? 이런 생각이 들지만 아무에게도 말 못함. 일 끊기면 앙대자나...



2.
올 한 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이직을 하고, 가장 아끼는 친구를 잃어야 했고, 더 가난한 공부노동자가 되었으며, 머리를 숭덩 잘랐다. (일주일 전에 더 잘랐는데 내년에 더 더 자를 듯)

그래도 퇴사하고 엄마 쓰러졌던 작년보다야, 훨 나았다.
인생은 늘 창의적인 고난의 구덩이로 (pitfall) 나를 밀어넣는데, 그때마다 꿋꿋하게 군말않고 기어올라온다. 그런 걸 생활력이라고 부르나. 

개인적으로 마음은 덜 힘들었는데,
직업적으로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내 노동력 가격 매기기.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겠다고 선언한 건 아닌데 (왜냠 넘 옛날부터 돈 받고 번역하고 있었는데?) 여튼, 본격적으로 일을 몇 개 하다보니 요율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첨엔 "전에 어떻게 계산하셨어요?" 라고 물어봤는데,
처음 일을 맡기는 분들에겐 그런 질문도 못하겠어서 페이지로 계산했다, 시급으로 계산했다, 하는데 이게 막상 일을 시작하면 작업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초반이니 일의 속도가 빠르지 않고, 그럼 시급의 의미가 사라지고, 번역도 '글'을 쓰는 일이다보니 다 끝냈다 생각하고 다시 보면 또 뭐가 보이고, 고치고 싶고, 오탈자가 나오고, 그런 거지.

그리고 내 번역에 자신이 없다. 내 위치를 잘 모르겠다. 물론 겸손이 70%정도 있다.
내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번역가/통역가'에는 아직 한참 못미친다.
내 기준이 높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나도 알아. 근데 그래도 어떡해. 아직은 '잘한다'고 못하겠는걸.

그러다보니 요율이. 아직도 어렵다. (이젠 가이드가 좀 생겼지만... 그게 적절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음)

한편 또 누구는 (상대적으로 낮게 부른 가격에도) "왤케 비싸요?" 하는데, 미래의 고객을 한 명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럼 다른 분 찾으세요" 하지도 못하겠고 근데 또 너무 낮게 부르면 추후에 가격 조정이 어려워서 역풍 맞기 좋고.



그리고 시간관리가 참 애매하더라.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데, 프리랜서가 아닌 친구들은 내가 오후에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니 약간 시간 많은 백수로 봤다. 자꾸 오후 시간에 뭐 하자고 하면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엔 약간 짜증? 나기도 했고.

이젠 좀 괜찮은데, 여전히 오후 근무는 너무 힘들어.
회사 다녀오면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 
개강하면 이제 더 지옥같겟지 ^^^^^^^^^^ 헤헤헤ㅔㅎㅎ^^^^^^^^^^



3.
악화일로.

도현이는 대부분의 경우 짜증나게 만든 원인보다 그런 일로 짜증을 느끼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이따위 일에 감정이 흐트러지다니, 자존심이 상했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그걸 인정하면서 또 자존심이 상했다. 

도현이는 스스로에게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 누가 말한 건지 기억도 안 나지만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가진 사람이고자 했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현대 지성인이 롤모델이었다. 물론 그 롤모델도 이름이나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도현이의 이성은 감정을 다스리는 대신 감정을 고조시키거나 악화시키기만 했다. 차분히 앉아 현실을 직시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볼수록 이성은 번번이 감정에 불을 질렀다.




2017. 12. 19.





도현아, 도현아, 어디쯤이었니? 

나는 걔가 어디냐고 물으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
그리고 전화 되냐고 물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좋은 소식일 때가 거의 없었거든. 꼭 그럴 때만 전화하더라. 의연해지려고 했었는데, 매번, 쿵 했어.








거의 3주가 걸린 원고가 끝났다.
헤헤, 저 탈고 햇찌용! 어서 궁디 팡팡 해주라주, 하고 어리광과 잘난체를 동시에 부리고 싶은데,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이 생각난다. 사실 무슨 답을 해줄지도 너무 예측가능한데, 그런데도 그 말을 또 듣고 싶은 게. 오늘은 잠깐만 슬퍼하다 자기로 한다.

글을 빨리, 잘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
언제 그런 사람 되지?




2017. 12. 17.




너무 너무 또라이같은데,
보고 싶다. 

너랑 같이 있을 때면, 매번, 완벽하게 빈틈없이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황홀했는데.





2017. 12. 16.




1.
집 근처에 도서관이 두 곳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생긴 청계도서관은 두 층으로 이루어져있고 성인이 사용 가능한 곳은 6층뿐이다. 하지만 조용하고, 사람도 별로 없고, 새 책이 많아서 자주 간다.

한 3주 전에 가서 '다윈 영과 악의 기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왔는데, 며칠 전에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다. 받으러 갔더니 무슨 백과사전을 주대?

곧 3권 분량으로 나누어 2판을 찍을 예정이라고 한다.
여튼, 3페이지 읽었는데, 재밌네, 이거.



2.
어제 처음으로 칼을 갈았다. 내가 간 건 아니고 칼갈이 소형 트럭이 와서 맡겼다.
니네 칼 갈아봤니?

엄마가 요리를 못하게 된 뒤로 내가 칼을 잡을 일이 많아졌는데, 늘 칼이 너무 무뎌서 고생이었다. 근데 딱히 칼을 어떻게 가는지, 어디서 갈아야 하는지 몰라서 냅뒀다가 어제 집 앞에 "칼~ 갈아요~" 하는 트럭이 왔길래 냅다 뛰어나갔다.

아저씨에게 아주 공손하게 "얼마예요?" 하고 묻고 (5,000원 넘으면 안 갈았을 듯)
"3,500원인데, 3,000원만 주세요." 하시길래 감사합니다! 하고 맡겼다.

10분 뒤에 칼을 찾으러 갈 땐, 집에 있던 비타 500과 빅 파이 한 개를 챙겨갔다.
인정 많은 어른인 척 한 것 같아 조금 뿌듯했다.



3.
복싱장 근처에 태국 음식점이 있다. 엄청나게 현지음식같은 건 아니고 그래도 태국음식을 전문으로 파는 곳이 도보 거리에 있다는 게 반가워서 종종 (이래봤자 반 년동안 세 번) 갔다.
갈 때마다 같은 걸 먹었다. 갠적으로 젤 좋아하는 태국 요리라!!! 

여튼, 근데 어제는 (칼 갈기 전에 복싱장에서 짐챙겨 나왔고, 오는 길에 여기 들렀다) 계산할 때 사장님이 말을 거시더라.

"뵐 때마다 공부하거나 책 보고 계신 것 같아요. 헤헤"

그래서 나도 "아, 헤헤. 네, 헤헤." 했다.

세 번 밖에 안 갔는데 왜 난 늘 어느 가게엘 가든 눈에 띄는 사람인 걸까, 의아해하면서 더 좋은 대답은 없었을까, 후회했다.



4.
포트노이의 불평이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서 일단 편의점 인간부터 읽었다.
임소라 작가님에게 편의점 사회학을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사실 막 우와 하는 책은 아니라...

편의점 인간을 읽고 왜 주인공이 살인을 안 하지? 라고 생각했다가
인간으로 사는 건 진짜 피곤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니면 현대 사회의 특징인 걸까, 원인은 뭘까, 왜 나는 자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알아서 뭐 하려고, 왜 알지 못하면 안심하지 못하지, 막 그런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5.
내가 없는 건 참을만 하겠다고 판단했겠지.
나는 잃어도 그 사람은 못 잃는 거였겠지.

처음엔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나는 본인이 맘대로 상상했던, 보채고, 조르고, 닦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결이든 박이든, 해보지도 않고 다 안다는 듯 말하던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땐 안 그러다가 연애 얘기만 나오면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갈라 보는 것도,
둘 다 못 끊는 건 똑같으면서 어느 하나가 더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머지 하나를 '치료'해야 할 해로운 중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근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나 잘 해야지.





The Best Everything of 2017 - Songs




영화 다 하고 나니 힘 딸려서 음악은 번역 못하겠는데,
심지어 54개나 돼???

이건 귀찮아서 그냥 링크만 올려야겠다. 헤헤헤헤.
나 책 리스트도 올려야 된단 말이야 헤헤헤헿... 그건 내일 하는 걸로?

2. 음악 The Best Songs of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