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SNS는 요 블로그만 아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
제가 간만에 신이 나서 쓴 에세이가 담긴 책이 나왔습니다.
15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괄호 안에 담아둔 사랑에 대해 적은 책이라 더욱 기대가 되는 에세이집이에요.
텀블벅이 열렸으니 많관부<3
(저는 <슈뢰딩거의 연애>를 썼답니다.)
엄마는 디스크 수술을 한 지 한 달째 되는 지난 주말, 연골이 다시 터지는 바람에 오늘 재수술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레이저 봉합이 아니라 아예 인공연골로 갈아끼우는 척추유합술로 진행했고, 지금 4인용 집중케어실에 들어와 있다. 오늘 척추수술 환자는 엄마뿐인지, 4인실을 엄마와 내가 독차지 하고 있고 나는 엄마 왼켠에 빈 침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스테이지 파이터를 졸린 눈을 비비며 보다 12시 반이 다 되어서야 세수를 하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엄마가 본가에서 챙겨온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데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우리 집 수건에서는 나지 않는 인공적인 꽃향기.
나도 독립을 하고, 트위터에서 자취생 필수 지식 따위의 팁을 보기 전에는 몰랐다. 본가에서는 늘 모든 빨래의 마무리 과정에서 섬유유연제를 챙겨 넣었으니까. 섬유유연제는 마지막 헹굼 전에 투여해야 해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세탁기 LED 패널에 숫자가 21분으로 떨어질 때까지는 집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세척한 속옷과 수건에서는 며칠간 기분 좋은 향이 났지만 금세 늘어나거나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직물의 특성에 따라 섬유유연제를 쓰면 안 되는 세탁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온라인 친구들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우리 엄마는, 혹은 내 동생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향기롭지만 세탁할 때마다 더 뻣뻣해지기만 하는 수건으로 온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겠지. 종국에는 쉰내가 날 수도 있고.
아까 엄마가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할 때 뭉개지는 발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네 자신감의 반만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게 다 참고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 앞에서라면 고든 램지보다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팩트만 내뱉는 나는 그나마 자신감이라고 부를만한 것들도 다 친구들에게서 배운 거다, 엄마가 나 어렸을 적에 밖에 나가 친구들에게 살갑게 구는 거 절반이라도 가족들에게 해보라고 언성을 높이던 순간들이 떠오르면 나도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데 그건 그 친구들이 나에게 알려준 삶의 지혜들이 내가 집에서 배울 수 있는 가정교육보다 훨씬 더 유용했고, 실용적이었고, 친절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해주었다. 결정적으로 친구들은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으니까. 이 가족 안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고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뿐이었다.
엄마는 그러게, 그래서 다행이다, 뭐 그런 답을 하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정말 더디게 간다. 오늘 내일, 허리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아야 하는 엄마는 꼼짝없이 와식 생활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오고 가는 정도의 움직임은 가능하다더라. 의학기술의 놀라움) 편마비로 이미 삶의 절반을 잃었던 엄마에게 이 신체의 제약은 얼마나 더 참담한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알고 싶지도 않다. 감정 이입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걸 적절히 공감하고 소화하되 과몰입하지 않고 나의 생활과 이 상황을 분리하는 근육같은 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에게 알려준 건 도대체 뭘까. 삶에 도움이 되는 조언은 뭐가 있었을까. 하물며 제대로 빨래하는 법조차 나는 온라인 친구들을 통해서 배워야 했다. 식기 별로 다른 세척 방법, 청소 용액의 활용법, 정리 꿀팁 이런 것들. 전세 대출이나 임장, 이삿짐 센터 선정, 전세와 월세 중 더 현명한 주거방식. 다른 집에서라면 이런 자잘한 생활의 지혜도 가족들에게서 상속받았을까?
옅은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은 아무 접점이 없고, 정확히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제 이해와 수용의 범주에서 타협점을 찾을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이런 엄마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엄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괴로움의 근원은 사랑의 부재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나의 사랑을 갈구할 때 느끼는 당혹감, 부담감, 더 나아가 거부감까지. 이 모든 문제는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기에 생기는 거겠지. 이걸 언젠가 엄마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노라고.
요즘 엄마의 death bed를 자주 상상한다. 내가 일을 좀만 쉴라치면 이렇게 대놓고 뻗어버려서 내 미래 계획같은 건 송두리째 내다버리게 만드는 사람. 내 노후자금을 볼모로 삼아 나의 미래를 단축시키는 사람. 엄마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그 많은 말들 중에 엄마 사랑해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는 고생 많았고 다음 생은 없기를 바란다는 말 정도가 아닐는지.
사는 게 너무 지겹다.
수면제 먹어서 넘 졸리네. 나도 이만 잘게.
수전 손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나는 가치를 인지하고, 부여하고, 창조하며, 더 나아가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거나 그의 존재를 보증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목록"을 작성하고자 하는 충동이 인다"고 기록했다.
아래는 그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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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s Consciousness Is Harnessed to Flesh: Journals and Notebooks, 1964-1980 Susan Sontag shares her thoughts. In her diary entry for August 9, 1967, Sontag explains why she enjoys making lists:
I perceive value, I confer value, I create value, I even create – or guarantee – existence. Hence, my compulsion to make ‘lists’. The things (Beethoven’s music, movies, business firms) won’t exist unless I signify my interest in them by at least noting down their names.
Nothing exists unless I maintain it (by my interest, or my potential interest). This is an ultimate, mostly subliminal anxiety. Hence, I must remain always, both in principle + actively, interested in everything. Taking all of knowledge as my province.
... on February 21, 1977, Sontag wrote her list of likes and dislikes:
Things I like: fires, Venice, tequila, sunsets, babies, silent films, heights, coarse salt, top hats, large long-haired dogs, ship models, cinnamon, goose down quilts, pocket watches, the smell of newly mown grass, linen, Bach, Louis XIII furniture, sushi, microscopes, large rooms, ups, boots, drinking water, maple sugar candy.
Things I dislike: sleeping in an apartment alone, cold weather, couples, football games, swimming, anchovies, mustaches, cats, umbrellas, being photographed, the taste of licorice, washing my hair (or having it washed), wearing a wristwatch, giving a lecture, cigars, writing letters, taking showers, Robert Frost, German food.
Things I like: ivory, sweaters, architectural drawings, urinating, pizza (the Roman bread), staying in hotels, paper clips, the color blue, leather belts, making lists, Wagon-Lits, paying bills, caves, watching ice-skating, asking questions, taking taxis, Benin art, green apples, office furniture, Jews, eucalyptus trees, pen knives, aphorisms, hands.
Things I dislike: Television, baked beans, hirsute men, paperback books, standing, card games, dirty or disorderly apartments, flat pillows, being in the sun, Ezra Pound, freckles, violence in movies, having drops put in my eyes, meatloaf, painted nails, suicide, licking envelopes, ketchup, traversins [“bolsters”], nose drops, Coca-Cola, alcoholics, taking photographs.
Things I like: drums, carnations, socks, raw peas, chewing on sugar cane, bridges, Dürer, escalators, hot weather, sturgeon, tall people, deserts, white walls, horses, electric typewriters, cherries, wicker / rattan furniture, sitting cross-legged, stripes, large windows, fresh dill, reading aloud, going to bookstores, under-furnished rooms, dancing, Ariadne auf Naxos.
(source: https://flashbak.com/susan-sontag-lists-her-likes-and-dislikes-1977-46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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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앞으로는 이 페이지에 내게 존재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고자 한다.
Things I like:
Crossing Han river on subway line 2 with seats scarcely occupied by passengers
Sunny days
Dry, hot summer days
Wearing long sleeves (pullover or hoodies) over a pair of short jeans or a mini skirt
Unplanned, spontaneous meetups with friends
Also a prescheduled date with a guy I’m interested in
Me in a well-fitted shape
Tanned skin with sun-kissed blush and freckles
Tender medium-rare steak with lots of grilled veggies
Fulfilling selfmade brunch
Sheer stockings and thick socks
Flat shoes and snickers
Rough sex
Tender strokes through hair or on my back
Architecture
Furniture by architects
Vintage goods
Sharing favorites with friends
Butter
Milk
Ice cream
Mild cheese of any sort
Spices
International markets
Local food
Long walk
Dresses
High-waist pants
Corduroy
Floating on water - pool, stream, river, ocean
P.F. candles
Apotheke incense sticks
Film photographs
Grand galleries
Small wrist watches
Fleece on the inside of clothes
Going to bookstores
Libraries
Dinosaurs
Deep-sea creatures
Reading my blog posts over and over again
Seeing a post about a new post on my friends' blog
Things I dislike:
Delayed promises
People pushing their way into a subway car even before passengers get off first
Subway passengers who stand in front of a door, right in the middle of the doorway, and do not move even when other passengers trying to get off or get on
Stench from wet garbage and not-properly-dried clothes
Being fat - lumps of belly fat and shallow valley along the spine on the back
Feeling poor - getting anxious and thus depressed when summing up the balances of my bank accounts
Guys who make me anxious, hasty, and hate myself
Insects
Blood-bound relationships
Doing dishes
Mopping
Dust
Workout
Goodbyes
Coming home alone after 12 a.m.
Being left alone after sex
Cold shower
Compulsive shopping
1.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좀 더 탄탄한 문장으로 짜임새가 견고한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은 책만 읽어서도,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것만으로도 될 일이 아니었다.
나연 씨, 합평을 다니는 건 어때요?
라고 했을 때 주저했던 것은 내가 누군가의 피드백을 곱게 소화할 정신력이, 혹은 맷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런데 그것보다도 내가 가 닿으려는 곳이 내 생각보다 험준하고 위태로운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셰르파가 간절해졌다. 내 부족함을 상세히 고지하고, 그것을 고려하여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셰르파.
몇 해째 마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단행본 원고에는 내가 아주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차마 고백하지 못한 나의 가장 추한 일면을 드러내야 아다리가 맞아 떨어지는 구간이 있다. 그 고개를 넘지 못해 자꾸 포기하고 그저 지면만 채우는 부실한 글로 눙치고 싶어진다. 나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서 바람에 흩어질 소리로도 내뱉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려니 낭떠러지로 내가 나 자신을 밀쳐내는 행위같아서 너무 무섭다. 잘못된 선택일 것 같아서. 설령 그것이 수치의 낭떠러지가 아니라 아주 약간의 기술만 있다면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그 구간을 훌륭하게 건널 재간도 없다. 내가 이렇게나 속물적이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내보여도 될,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다시 또 넘어지는 수치를 기꺼이 내보이겠다 마음의 준비가 된, 셰르파의 도움이 필요하다.
언젠가 글쓰기를 배운다면 진선의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과외를 받고 싶다. 진선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 진선에게는 찐득한 피를 뚝뚝 떨구며 끈적하게 서로 얽힌 내 내장을 꺼내보여도 나를 역겨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날 것의 나를 다시 잘 정돈하여 알맞은 자리에 넣어주고, 여며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진선 앞에서라면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제대로 나를 단련시키려면 내 위선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내보이고, 또 그들의 반응을 소화시키는 일을 연습해야 하는 게 아닐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셰르파에게만 기댈 것이 아니라 랜덤하게 정해진 면접장 토론조 조원들처럼 냉철한 눈으로 나의 글을 단어와 조사 단위까지 해부하고 반박할 투지를 불태우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
2.
휴직 1일. 오늘은 죄책감을 갖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의 시간을 가져보려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챙기고, 잠시 낮잠을 잤다 운동을 갔고, 돌아와 책을 읽다 저녁을 먹고 물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앞 마트에서 장을 보고 퀴노아를 안친 다음 책상에 앉아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오늘 본 인상깊었던 장면 따위를 적을 때에도 일기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꼭지만큼은 일기로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연습이라고 하기에는 자잘한 집안일들이나 운동을 하긴 했지만 오늘 하지 않으려고 가장 노력한 것은 sns 보기, 유투브나 영상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기, 요 두 가지다. 친구들의 DM에 답한 것 외에는 아직까지(저녁 8시가 조금 안 되었다) 잘 참고 있다.
약속도 일정도 없는 휴일이면 침대에 누워 종일 피드를 새로고침 하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창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딱히 나를 찾는 사람도, 나의 흥미를 끌 일도 없는 피드를 훑고나면 종일 뭘 한 건가 한심해서 우울해지기만 했다. 휴직 기간 내내 무얼할 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상태라 또 그짓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우선 sns부터 멀리하기로 했다.
그다음은 영상 스트리밍. 집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불안하다기보다는 적막이나 무자극의 상태를 못 견뎠던 것 같다. 그게 초조해서 뭐라도 틀어두고 살았다. 그러다보면 화면에 정신이 팔려 넋을 놓기 일쑤였고. 오늘도 종일 음악을 틀기는 했지만 그래도 식사시간에도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래서 맛이 더 잘 느껴지거나 음식을 더 감사하게 되는 일 따위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주는 자극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작은 성취감은 얻었다.
그렇다고 휴직기간 내내 이렇게 지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콘센트에 꽂아두기만 하면 작동하지 않아도 전력을 소모하는 전자기기처럼 나도 모르게 내 정신적 에너지를 야금야금 방전시키는 행동들을 좀 줄이고 나를 심심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심심함의 알을 버틸 힘을, 깰 힘을 길러주고 싶다. 필요성을 실감하고 싶다.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음" 보다는 "무엇이든 하려는 강박"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근데 그것도 "제어하기"를 통해서 해야 하는데, 이게 선생님이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음" 맞나 모르겠네. 통제강박 되면 어떡해?
1.
휴직 has been effective, starting 6 hours ago.
2.
방학 아닌 방학 같은 기분이다.
벌써 사무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연락에 신경 끌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후련하기도 하다.
병원에서 선생님은 휴직 기회가 주어져 너무 다행이라며,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여행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데 지금은 사실 무언가를 계획할 힘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만 싶은데 또 막상 아무것도 안 하면 못 견디겠다 푸념했다. 그것도 불안도가 높은 탓이라던 선생님은 이 기회에 한 번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해보라고 제안하셨다.
제안은 아닌가? 치료에 필요한 과정은 아니고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곱씹어보다 두 번, 세 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보라고 반복하셨던 걸 보면 진심으로 제안하셨던 것 같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건 뭘까? 이것조차 어떤 행위로 느껴져서 어쩐지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쉬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미국에 가야했던 열일곱 이후로 아무 의무도 책임도 없이 일주일 이상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방학이면 집안일과 눈칫밥에 시달리며 한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차라리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자유로웠으니까. 대학생이 된 후로는 공부하는 시간을 제하면 항상 회사나 외주일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최대한 빨리 다음 수입처를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시달리며 이력서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됐고, 그걸 넘어 엄마까지 책임져야 하는 "형편"에 쫓겨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내 삶을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잠시라도 멈추면 혼신의 힘을 다 해 그러쥐고 있던 내 삶이 다 무너져내려서 다시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단 하루도 맘 편히 쉬지 못했다.
돌아갈 곳이 있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는 상태에서, 더는 생계 걱정에 시달리며 일거리를 찾느라 자다 깨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휴무의 시간. 이 귀한 기회를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행위로 채워도 되는 걸까?
다만 슬랙을 지우고, 책을 많이 읽고, 내 글을 쓰고 싶다. (돈은 최소한만 쓰고)
3.
아까 미류랑 현석 오빠 만나서 이 얘기도 책에 써야겠다! 했던 이야기 거리가 있었는데
뭔지 또 까먹었네. 역시 생각났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메모해둘 걸 ㅠ
3-2.
와우! 당근 품목으로도 알 수 있는 동네 간 소득 격차 혹은 소비 패턴
4.
어제 태현에게 나의 가장 커다랗고 허술하고 부실한 버튼을 읊어주었고, 태현은 그제서야 내가 왜 나인지 이해가 간다고 고생이 너무 많았겠다며, 가여워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화내는 연습부터 하자며 웃었다.
가족은 끝도 없이 나를 축내는데 그만큼 친구들에게 빚져서 살아온 삶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밤.
5.
이제 깨에 대해 고심하지 않는다.
즐겁지 않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치있게 쓰이고 싶어. 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1.
휴직기간이 정해졌다.
어떻게 보내야할 지 아직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오로지 카드명세서 원고 마감과 슬랙앱 삭제뿐.
2.
깨의 집에 가면 주로 내가 먼저 씻고 나온다. 외출복 차림으로는 절대 침대에 오르지 않는다는 생활규칙에 공감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룰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닦는다. 내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침대에 누울 때 즈음이면 깨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다. 나는 그가 내어준 여행용 메모리폼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 채로 핸드폰을 보고, 깨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나는 깨의 등 뒤로 위치를 옮겨 자세를 고쳐 앉고 드라이기를 넘겨달라 손을 내민다. 깨는 아무말 없이 드라이기를 건네준다. 그리고 굽어 있던 어깨를 활짝 펴 듯 양팔을 몸에서 멀찍이 뻗어 내 쪽으로 자신의 몸을 기대온다. 방금 전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찰랑거리는 머리를 말리던 소년은 순식간에 거만해 보이기까지하는 군주의 자세로 내게 자신의 일부를 맡긴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다.
과묵하고 무심한 몸짓으로 머리를 말리던 아이가 갑자기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내 손길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그 태도 변화며, 아직 물을 한껏 머금은 머리칼에 바람이 스칠 때마다 퍼지는 똑같은 샴푸 냄새, 똑같은 바디워시 향이 나는 맨살에 맨살이 닿는 느낌까지.
적막한 밤, 머리를 말릴 때마다 나는 깨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좋겠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문득 내가 궁금해지라고.
2-2.
이 모습을 꼭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깨에게 동의를 얻고 몇 장 촬영하고 싶다. 필름으로, 플래쉬 없이. 뭐 좀 키치하려면 플래쉬 약하게 켜고. 어찌돼었든 기록하고 싶어. 박제하고 싶어.
3.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술 사이 혀까지, 타인의 몸에서 나와 같은 냄새가 나는 거, 너무 이상한 기분이야. 클론을 만난 것 같은 생경함과 흥분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