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3.

직업이 있는 백수




1.

휴직 has been effective, starting 6 hours ago.



2.

방학 아닌 방학 같은 기분이다.

벌써 사무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연락에 신경 끌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후련하기도 하다.


병원에서 선생님은 휴직 기회가 주어져 너무 다행이라며,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여행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데 지금은 사실 무언가를 계획할 힘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만 싶은데 또 막상 아무것도 안 하면 못 견디겠다 푸념했다. 그것도 불안도가 높은 탓이라던 선생님은 이 기회에 한 번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해보라고 제안하셨다.

제안은 아닌가? 치료에 필요한 과정은 아니고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곱씹어보다 두 번, 세 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보라고 반복하셨던 걸 보면 진심으로 제안하셨던 것 같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건 뭘까? 이것조차 어떤 행위로 느껴져서 어쩐지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쉬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미국에 가야했던 열일곱 이후로 아무 의무도 책임도 없이 일주일 이상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방학이면 집안일과 눈칫밥에 시달리며 한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차라리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자유로웠으니까. 대학생이 된 후로는 공부하는 시간을 제하면 항상 회사나 외주일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최대한 빨리 다음 수입처를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시달리며 이력서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됐고, 그걸 넘어 엄마까지 책임져야 하는 "형편"에 쫓겨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내 삶을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잠시라도 멈추면 혼신의 힘을 다 해 그러쥐고 있던 내 삶이 다 무너져내려서 다시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단 하루도 맘 편히 쉬지 못했다. 


돌아갈 곳이 있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는 상태에서, 더는 생계 걱정에 시달리며 일거리를 찾느라 자다 깨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휴무의 시간. 이 귀한 기회를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행위로 채워도 되는 걸까?


다만 슬랙을 지우고, 책을 많이 읽고, 내 글을 쓰고 싶다. (돈은 최소한만 쓰고)




3.

아까 미류랑 현석 오빠 만나서 이 얘기도 책에 써야겠다! 했던 이야기 거리가 있었는데

뭔지 또 까먹었네. 역시 생각났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메모해둘 걸 ㅠ




3-2.

와우! 당근 품목으로도 알 수 있는 동네 간 소득 격차 혹은 소비 패턴




4.

어제 태현에게 나의 가장 커다랗고 허술하고 부실한 버튼을 읊어주었고, 태현은 그제서야 내가 왜 나인지 이해가 간다고 고생이 너무 많았겠다며, 가여워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화내는 연습부터 하자며 웃었다. 

가족은 끝도 없이 나를 축내는데 그만큼 친구들에게 빚져서 살아온 삶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밤.




5.

이제 깨에 대해 고심하지 않는다.

즐겁지 않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치있게 쓰이고 싶어. 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댓글 2개:

  1. 그 모든 불안과 압박감을 견뎌내고 여기까지 차곡차곡 걸어오신,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서 뵙게 된 나연님은 제가 봐왔던 누구보다 단단하고 멋진 분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 그간 쉼 없이 달려오신 만큼 이번 휴식 기간은 나연님 마음이 가장 편안한, 온전하고 안정적인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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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정한 위로 감사합니다. (어쩐지 작가님이실 것 같은데) 이 귀한 휴식, 후회 남지 않는 10월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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