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

 




1.

휴직기간이 정해졌다. 

어떻게 보내야할 지 아직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오로지 카드명세서 원고 마감과 슬랙앱 삭제뿐.



2.

깨의 집에 가면 주로 내가 먼저 씻고 나온다. 외출복 차림으로는 절대 침대에 오르지 않는다는 생활규칙에 공감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룰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닦는다. 내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침대에 누울 때 즈음이면 깨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다. 나는 그가 내어준 여행용 메모리폼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 채로 핸드폰을 보고, 깨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나는 깨의 등 뒤로 위치를 옮겨 자세를 고쳐 앉고 드라이기를 넘겨달라 손을 내민다. 깨는 아무말 없이 드라이기를 건네준다. 그리고 굽어 있던 어깨를 활짝 펴 듯 양팔을 몸에서 멀찍이 뻗어 내 쪽으로 자신의 몸을 기대온다. 방금 전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찰랑거리는 머리를 말리던 소년은 순식간에 거만해 보이기까지하는 군주의 자세로 내게 자신의 일부를 맡긴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다. 

과묵하고 무심한 몸짓으로 머리를 말리던 아이가 갑자기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내 손길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그 태도 변화며, 아직 물을 한껏 머금은 머리칼에 바람이 스칠 때마다 퍼지는 똑같은 샴푸 냄새, 똑같은 바디워시 향이 나는 맨살에 맨살이 닿는 느낌까지.

적막한 밤, 머리를 말릴 때마다 나는 깨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좋겠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문득 내가 궁금해지라고.



2-2.

이 모습을 꼭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깨에게 동의를 얻고 몇 장 촬영하고 싶다. 필름으로, 플래쉬 없이. 뭐 좀 키치하려면 플래쉬 약하게 켜고. 어찌돼었든 기록하고 싶어. 박제하고 싶어.



3.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술 사이 혀까지, 타인의 몸에서 나와 같은 냄새가 나는 거, 너무 이상한 기분이야. 클론을 만난 것 같은 생경함과 흥분감이 있어.




댓글 2개:

  1. 깨님은 행복하실거예요. 몸과 마음의 행복을 모두 되찾을 수 있는 휴직기간이 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

    답글삭제
    답글
    1. 깨는 아무 생각 없다고 말할 것 같지만, 휴직은 최대한 느긋하게 보내볼게요. 감사합니다 :)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