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디스크 수술을 한 지 한 달째 되는 지난 주말, 연골이 다시 터지는 바람에 오늘 재수술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레이저 봉합이 아니라 아예 인공연골로 갈아끼우는 척추유합술로 진행했고, 지금 4인용 집중케어실에 들어와 있다. 오늘 척추수술 환자는 엄마뿐인지, 4인실을 엄마와 내가 독차지 하고 있고 나는 엄마 왼켠에 빈 침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스테이지 파이터를 졸린 눈을 비비며 보다 12시 반이 다 되어서야 세수를 하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엄마가 본가에서 챙겨온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데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우리 집 수건에서는 나지 않는 인공적인 꽃향기.
나도 독립을 하고, 트위터에서 자취생 필수 지식 따위의 팁을 보기 전에는 몰랐다. 본가에서는 늘 모든 빨래의 마무리 과정에서 섬유유연제를 챙겨 넣었으니까. 섬유유연제는 마지막 헹굼 전에 투여해야 해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세탁기 LED 패널에 숫자가 21분으로 떨어질 때까지는 집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세척한 속옷과 수건에서는 며칠간 기분 좋은 향이 났지만 금세 늘어나거나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직물의 특성에 따라 섬유유연제를 쓰면 안 되는 세탁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온라인 친구들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우리 엄마는, 혹은 내 동생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향기롭지만 세탁할 때마다 더 뻣뻣해지기만 하는 수건으로 온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겠지. 종국에는 쉰내가 날 수도 있고.
아까 엄마가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할 때 뭉개지는 발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네 자신감의 반만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게 다 참고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 앞에서라면 고든 램지보다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팩트만 내뱉는 나는 그나마 자신감이라고 부를만한 것들도 다 친구들에게서 배운 거다, 엄마가 나 어렸을 적에 밖에 나가 친구들에게 살갑게 구는 거 절반이라도 가족들에게 해보라고 언성을 높이던 순간들이 떠오르면 나도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데 그건 그 친구들이 나에게 알려준 삶의 지혜들이 내가 집에서 배울 수 있는 가정교육보다 훨씬 더 유용했고, 실용적이었고, 친절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해주었다. 결정적으로 친구들은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으니까. 이 가족 안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고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뿐이었다.
엄마는 그러게, 그래서 다행이다, 뭐 그런 답을 하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정말 더디게 간다. 오늘 내일, 허리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아야 하는 엄마는 꼼짝없이 와식 생활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오고 가는 정도의 움직임은 가능하다더라. 의학기술의 놀라움) 편마비로 이미 삶의 절반을 잃었던 엄마에게 이 신체의 제약은 얼마나 더 참담한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알고 싶지도 않다. 감정 이입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걸 적절히 공감하고 소화하되 과몰입하지 않고 나의 생활과 이 상황을 분리하는 근육같은 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에게 알려준 건 도대체 뭘까. 삶에 도움이 되는 조언은 뭐가 있었을까. 하물며 제대로 빨래하는 법조차 나는 온라인 친구들을 통해서 배워야 했다. 식기 별로 다른 세척 방법, 청소 용액의 활용법, 정리 꿀팁 이런 것들. 전세 대출이나 임장, 이삿짐 센터 선정, 전세와 월세 중 더 현명한 주거방식. 다른 집에서라면 이런 자잘한 생활의 지혜도 가족들에게서 상속받았을까?
옅은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은 아무 접점이 없고, 정확히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제 이해와 수용의 범주에서 타협점을 찾을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이런 엄마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엄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괴로움의 근원은 사랑의 부재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나의 사랑을 갈구할 때 느끼는 당혹감, 부담감, 더 나아가 거부감까지. 이 모든 문제는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기에 생기는 거겠지. 이걸 언젠가 엄마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노라고.
요즘 엄마의 death bed를 자주 상상한다. 내가 일을 좀만 쉴라치면 이렇게 대놓고 뻗어버려서 내 미래 계획같은 건 송두리째 내다버리게 만드는 사람. 내 노후자금을 볼모로 삼아 나의 미래를 단축시키는 사람. 엄마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그 많은 말들 중에 엄마 사랑해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는 고생 많았고 다음 생은 없기를 바란다는 말 정도가 아닐는지.
사는 게 너무 지겹다.
수면제 먹어서 넘 졸리네. 나도 이만 잘게.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부채감으로 다가오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평생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는 나연님은 이미 대단한 분이세요. 종교는 없지만 나연님 어머님의 육체적, 나연님의 마음의 건강을 기도하겠습니다. 힘들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덜 힘드셨으면 좋겠어요.
답글삭제이 죄책감은 아마 평생을 안고 살 것 같아요. 가족이란 뭘까 늘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기도도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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