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1.

이사




사슴의 집에 온 지 1년이 갓 넘었는데 같은 평수 전세 보증금이 6000-7000만원 가량 올랐다.

월세도 적당하고, 관리비도 엄청 저렴하게 나와서 이 집엔 아무 불만이 없었다. 작은 방이 고시원 같아서 옷 갈아 입을 때 말곤 안 들어간다는 점 빼고.

겸사겸사 결국 전세로 옮기기로 했다. 

계약서에 싸인하는 날 보증금의 10%를 계약금으로 임대인에게 송금해야 하는데 1일 이체한도를 한참 넘는 금액이었다는 걸 송금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서야 알았다. 사는 동안 한 번도 천만원이 넘는 크기의 돈을 어디로 보내거나 받아본 일이 없었으니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니 집주인 내외분들이 괜찮다고, 내일 마저 넣고 전세 대출금 이체하기 전에는 은행 내방해서 억 단위로 늘려놓으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리고 지난 주말, 카카오뱅크에서 (개 tmi네) 전월세보증금대출 상품을 신청하고, 화요일즈음 승인 연락을 받았다. 2억에 가까운 돈이 내 이름으로 (나를 스쳐)왔다, 간다. 

에어콘을 설치하던 날엔 조금 벅차고 뿌듯한 어른의 기분이이었다면 이번주는 좀 서러운 어른이다.
은행 곳간에 잠들어 있던 돈이 내 이름을 달고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간다. 나는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인데. 고래 잔치에 낀 새우라, 등이 터지지 않기 위해 꼬박꼬박 몇 십만원의 이자를 은행에 낸다. 돌려받을 수 없는 돈. 신용은 내가 빌려주는데 왜 그 대가도 내가 치러야 하는 거지. 

그래도 갖고 싶었던 소파를 사서, 놓고 살 약 6평의 공간이 더 생겼으니 좋아하고 뿌듯해 해야겠지?
근데 왤케 다 버겁다는 느낌인지 모르겠네.


여튼 첫 집은 이렇게 이별. 근데 벌써 그립다, 이 집.


(서울시내에 이만한 조건의 투룸 아파트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집 구하시는 분들 연락주세요.(?))




2021. 2. 20.

근황 업데이트

 



1.

독립한 지 곧 반 년이 된다(오 생일날 딱 6개월 되네). 세상 시간 진짜 빠르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간 많은 친구들이 다녀갔다. 예상치도 못했던 손님들도 있었고, 남자를 보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간 사람도 있었다. 아무나 집에서 재우지 말아야겠다 결심했지만 예외도 있었다. 가장 고대했던 네 발 달린 친구는 일주일 가까이 자고 갔다.

아직 못 온 친구들도 몇몇 있지만, 친구들 덕분에 덜 외로웠다. 덜 춥게 지냈다. 




1-2.

글자 그대로 덜 춥게 지냈는데, 우리집에 채광이 어느 정도로 잘 드냐면 나는 12월이 될 때까지도 우리집 보일러 밸브가 잠겨 있는 것도 몰라서 1월까지 도시가스비가 0원이었다. 관리사무소 선생님이 오셔서 확인 안 해주셨으면 겨울내 보일러도 못 틀고 ‘이 집은 원래 이렇게 틀어도 쌀쌀하고 안 틀어도 뜻뜻하고 그런가?’ 하며 지냈을 거다. 하이고.




2.

클럽하우스라는 새로운 sns가 생겼다. iOS에서만 사용가능한데다, 영어 UI, 인비테이션 기반 가입방식 등 여러 진입장벽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서비스임에도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사용자 중 아주 높은 비율이 테크 산업 종사자들이나 마케터, 홍보 전문가들. 이 기회를 노려 여러 (중견)스타트업에서 기업 설명회 같은 취업 설명회 같은 묘한 세션들을 열고 있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쟉은 채널에 옹기종기 모여 내부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도 당연히(?) 채용 설명회 비스무레한 세션을 진행했고,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팀원들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책 얘기까지 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아주 소수의 회사 동료분들께 인스타 계정까지 알려드리게 되었다.(알려드린 것보다는 클하 프로필에 인스타 계정을 연동시켜둔 탓에 실제로 클하에서 만난 다양한 분들이 인스타까지 팔로우해주셨다. 인클루딩 정재승 교수님. 아 대박 가슴 설렛찌 모야...)


고로...

이제 토비즈 계정에는 좆이네 엿이네 씨발이네 같은 소리는 못할 것 같다...




2-2.

우리 회사에 글 쓰는 분들 많더라. 블로그든 브런치든 시든 뭐든.




3.

사내 북클럽에서 장애학 도서를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각자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이런 분들과 일 하고 있어서 천운이다. 일복과 직장복은 타고 났다 증말.




4.

안 마시던 커피를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마신다고 표현하기 머쓱할 정도로 일주일에 연하게 탄 라떼 한 잔 정도 마실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카페인 수혈이 아니라 맛이 그리워 커피를 마신 건 진짜 오랜만이다. 물론 커피 맛 뭣도 몰라서 서교동 앤트러사이트에서 모카포트로 내려준 라떼가 내 기준에선 젤 맛있다. 혀지네 오빠네 txt 커피 라떼도 진짜 존맛이었는데.




5.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려 한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 

친구도 별로 없는데, 그 중에 차 가진 친구는 더 드물고, 그 사람들(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는 사이)에게는 차마 어딜 같이 가달라 부탁할 염치가 없어서, 그냥 내가 해야겠다. 하아... 어바인에서 면허 시험 세 번 떨어진 순간 평생 운전따윈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될까.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네 ㅠ


근데 뭐 걔도 하고 쟤도 하는데 나도 딸 수 있겠지, 면허...


그리고 회사 언제까지 다닐지 모를 일이므로(회사에서 학원비 지원해줌) 일단 학원은 등록해야 한다.




5-2.

아, 회사에서 아이패드도 사줬고, 책도 개 마니 사주고, 러닝화도 사주고, 1:1 pt도 끊어줬다. 이거랑 재택근무때문에 진짜 이직 엄두도 안 난다. 넘 좋다.

사랑해요 순두부두...




PS.

아까 앤트러사이트 입구에서 토스트랑 비슷한 친구와 함께 광합성 하고 있는 커플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나한테는 왜 저런 일이 도무지 주어지지 않는 걸까. 내 삶에 유일하게 없는 행복. 내가 애타게 그리는 행복은 볕 좋은 주말, 강아지와 사랑하는사람과의 산책을 곁들인 라떼의 맛. 






카메라를 든 남자들

 



1.

첫 남자친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이 올린 사진 몇 장 때문이었다.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군지 궁금했다. 그 눈이 보는 세상이 궁금했다. 그 눈에 예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만났다. 




2.

영화 감독, 감독 지망생, 카메라 상점 주인, 사진 작가 등등.

첫 남자친구 이후로도 카메라를 든 남자를 오지게도 만났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사람이거나 못해도 카메라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고 사물이고, 장삼이사 발에 채이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찾아내 세상에 다양한 시선이 있음을,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이 아직 많음을 몸소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좋았다. 숱하게 당하고 뒷통수 맞아놓고도 여전히 좋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 보면 주인공인 ‘심시선’이 남편이란 존재의 무용함에 대해 설파하면서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다고 평한다. 그래요, 그럴 수 있죠. 제가 그래서 렌즈 하나 더 달고 다니는 남자에게 끌리나봅니다요.




3.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상냥하게, 다정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려고 한 게 죄인가. 

취향이든 뭐든, 왜 늘 ‘대가’를 치뤄야 하는 걸까. 왜 늘 이런 취급 당해야 하는 걸까.




4.

아니 씨발, 그런 새끼들도 옆에 멀쩡하게 애인은 끼고 있자나. 나는 왜 아니냐고. 시발 진짜.






Not a big fan of regret and boredom

 



1.

믄재가 비비 좋아한다고 할 때 좀 들어둘 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비비 노래를 열청하고 있다.

얼굴은 낯선데 목소리가 익숙해서(낯익었다고 썼다고 목소리에 낯이 있나? 싶어서 다르게 적는다) 유투브를 뒤졌더니 예전에 타이거 JK랑 윤미래랑 다 같이 어디 나온 걸 본 적이 있더라고(내가). 그때 ‘안 맞는 옷을 입혀 나왔네. 저런 거 아님 더 잘 놀겠구만’ 이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기억났다.



2.

가장 많이 돌려 듣고 있는 건 쉬가릿과 비누. 어떤 분 인스타 들어갔다가 쉬가릿 라이브를 보그랑 찍은 동영상을 보고 치여서 듣고 또 듣는데, 드디어 20대 여성 뮤지션이 담배와 콘돔 얘기를 자유롭게 해도 되는 날이 온 것인가!!! 좋아서 들었다. 내 책 너무 보내드리고 싶더라.

하지만 가슴에 가장 진하게 박힌 가사는 비누의 한 대목이었다. 


오늘 했던 거짓말들

어제 했던 bad decision

Do you know how to keep myself clear

다 비누로 씻어내는 거지


이 부분 최고야. 



3.

영상을 보고, 인터뷰를 뒤지고, 노래를 종일 듣다 내가 이 뮤지션을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쁘고 재능있는 거야 당연히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부러운 건 다른 면이었다.

나쁜 선택에게 내어줄 시간이 있다는 점. 그리고 오늘 다시 거짓말을 해도 내일 비누로 씻어내면 그만인 그 여유, 나에게는 이제 사치인 일을 맘껏, 양껏 낭비 할 수 있다는 점. 그게 눈도 못 뗄 정도로 부럽더라.


더 실수하면서 살 걸, 

더 엉망진창인 선택들을 하며 살 걸,

그때 가진 거라곤 시간과 감정뿐이었는데, 더 무모하게 쓰면서 살 걸,

더 저지르면서 살 걸.(물론 충분히 그러고 산 것 같지만, 그래도.)


이젠 체력이 안 돼서, 잃을 것이 많아서, 다시 쌓는 일이 두려워서 선택은커녕 생각도 맘대로 하질 못한다.

요새 ‘더 열심히 살 걸’하는 아쉬움이 꼭 연못 아래로 가라앉았던 낙엽 떠오르듯 슬쩍 슬쩍 올라온다. 절대 그 보다 더 열심히 살 수는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종류의 열심일까. 뭐가 아쉬운거지. 그렇다고 지금 삶이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도 아닌데.



4.

BIBI님 더 내키는대로 맘껏 살아주세요. 그리고 그거 꼭 노래로 남겨주세요.







2020. 11. 5.

 



내가 주는 건 뭐든 거절하는 사람과 오래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밥을 산다고 해도 괜찮다며 꼭 자기가 내거나 각자 내는 쪽을 택했고, 무얼 선물해주고 싶다고 말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정 뭘 사주고 싶어질 땐 일단은 사고, 제발 좀 그냥 가져가라고 떠밀어야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조용히 가방에 넣는 사람이었다. 

내 애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 4년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은 받고 말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마음이란 언제나 일방적이다. 주면 끝. 상대가 무턱대고 들이대면 내가 거절할래야 거절할 수가 없다. 이미 봐 버렸으니까. 예고도 없이 찾아와 두고 간 마음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란 보고도 무시하거나, 나 역시 마음을 주러 가는 것뿐. 그는 그 중간쯤이었다. 내가 두고 간 마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감상했다. 


나연씨가 저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끔은 진심을 다해 안쓰럽고 안타까워 해줬다.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좋아해요. 그런 거.



받는 일에 대해 그렇게 철벽을 쳤던 것 치고 그 사람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걸 남겨주고 갔다. 갔나? 내가 떠난 건가?

여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었다. 정기든 온기든 지식이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머릿속이 깜지가 되도록 그가 썼던 단어, 그가 언급했던 책, 영화, 다큐, 만화, 기사 전부 되새겼다. 그리고 기약없는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그가 알려준 건 몽땅 공부해갔다. 


3차 성징기처럼 그를 만나는 동안 엄청나게 자랐다. 그를 양분 삼아.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정말 뭘 주긴 했나 싶다. 그 사람은 날 만나는 동안 나로인해 자극 받거나 영감, 하다 못해 글감이라도 얻어갔을까? 나는 기꺼이 그의 글이 되고 싶었는데. 그보다 더 영광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중한 거절과 받는 시늉 중에 뭐가 더 쓰린가 생각하다, 네.



2020. 11. 4.

취향의 역사

 



1.

얼마 전에 빈티지 오디오를 보고 왔다. 회사에서 이제 오디오도 사준다길래 (이미 에어팟도 사줬고 나이키도 사줫고 체스도 사줫지...) 스피커나 앰프를 좀 바꾸려고 레몬서울에 예약까지 해서 부랴부랴 달려갔지.

예약제인 탓에 넘나 주인 두 분과 나만의 사적인 시간처럼 느껴져서... 어정쩡하게 쭈뼛거리고 있자하니 남자 사장님이 스피커 들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틀어드려요, 라고 상냥하게 안내해주셨다. 대강 내가 찾는 게 무엇인지 설명하니 집에서 주로 무슨 음악을 듣느냐고 물으셨다.


어, 아, 그게... 인디 힙합이랑 포크요호호ㅗㅎ흫흐흫ㅎ.ㅎ...


하면서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음악 장르에 인디라고 말을 붙인 것도 너무 멍청한 것 같았고, 켄드릭 라마 듣다가 갑자기 천용성 꺼내 듣는 내 취향을 떠올리니 그또한 마구잡이인 거 같아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던 것. 사장님도 조금 따라 웃으셨다.

한 10초 정도,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 표정을 좀 가다듬고 그냥 좋은 음악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사장님이 그럼요, 다양하게 듣는 거 좋은 거죠, 하면서 공기공단의 코토모를 꺼내 틀어주셨지! 맙소사!!!

너무 오랜만이라 "으아! 싸이월드 감성!!" 이라고 육성으로 소리질렀다. 근데 그게 또 금방 기억이 나서 (속으로만) 따라 부르게 되더라?


어마어마하게 사고 싶은 물건은 없어 공손히 인사하고 나왔지만 오길 잘했다고 뿌듯해 했다. 

이런 얼렁뚱땅 중구난방을 긍정해주는 사람과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필요하고 말고.



2.

문득 블로그 아카이브를 보는데, 이 블로그를 7년째 하고 있더라. 와. 

그리고 그때 글이 훨씬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말까진 진짜 두 번째 책 원고 끝내야지 (번역서도...). 이젠 진짜 책 내고 싶다. 새 책으로 사람들 만나고 싶다. 책 대충 보고 날 무슨 얘기든 다 해도 되는 사람 취급하거나 자기 일탈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다.




CANs and CANNOTs

 



1.

지금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커리어에 있어서는 특히.

30대에 접어들고 나선 더 확신하게 됐다. 성인이 되고나선 해보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해보고 살았다. 그 과정이 거칠고 험난했기로서니, 결국 하긴 했다. 


어제 대학원 동기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이직 제안이 왔다. 링크드인으로 일자리 제안은 심심치 않게 오는지라 호들갑 떨 일도 아니지만 내심 통번역이 아니라 다른 업무로 동기들과 같은 회사에 일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들떴다. 대우는 좋을까, 연봉은 더 주나, 잠깐 단꿈에 젖었다. 

영어를 쓸 수 없는 업무였지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도 마음이 동했다. 포트폴리오도 까지꺼 준비하면 되지.

그런데 이직을 할 이유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다. 


내달이면 입사 1주년이다. 입사하고 첫 달부터 지금까지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90%에 달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는데, 글쎄올시다. 이 회사가 그래. 그런 회사가 있더라고. 



1-2.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데에는 분명한 장단이 있다. 나쁜 소식부터 전하자면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뗏목에 올라탄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늘 무의식 저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고 기쁜 소식이라함은 빼어난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조직이 급성장 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회사(들)에 다닐 때는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직장인의 격언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기 와선 한 달에 한 번씩은 각성한다. 서로의 사적인 정보에 대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내 문화 덕분에 다들 어떤 일을 하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알 기회가 없는데, 간혹 링크드인이나 외부 자료를 통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이력을 발견한다. 카카오나 다음, 네이버는 물론이거니와 애플이나 구글, 페이스북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있다. 회사 이름 한 방으로 단말마의 감탄사가 나오는 그들의 이력을 보자면 나의 일관성 없는 경력이 쟉고 소듕하게 느껴지는 게 우선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람들의 동료로 일한다는 사실에 고무된다.


사실 이 회사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실천되는 자율성이었다. 거창한 말만 늘어놓을 뿐 실제로 직원의 역량과 태도를 100% 신뢰하는 회사는 내 알기엔 0에 가까운데, 이 회사는 그래도 80%는 실천하고 있다. 회사가 실천하고 있다기 보다는 직원들이 일구어내는 쪽에 가깝다. 서로 끊임없이 싱크를 맞추고, 문제가 발견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해결방안을 만들어내고(이건 엔지니어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에 대해 공적으로 치하한다. 근태를 체크하는 시스템이 없어도 다들 어련히 알아서 나와 해야 할 몫을 다 하고 집에 간다. 언제 오냐 다그치지도, 벌써 가냐 눈치주지도 않는다. 뭐 개중에는 설렁설렁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여러 동료들과 일해본 바로는 내가 가장 게으른 게 아닐까 반성하게 되는 분위기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냥 그런 업무 윤리 의식을 가진 사람들만 뽑아 놓은 거겠지, 혹은 그런 업무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니 업계 탑이라는 곳에서도 일할 수 있었던 거겠지, 혼자 자문자답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데 여길 오다니?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지만). 그러곤 다시 비쥬얼 스튜디오를 켜지.


물론 이 회사도 조직이다. 행정처리가 일관성이 없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팀끼리 감정 상할 일도 벌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개인이 모였다해도 조직은 조직이기에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에러가 있다. 다 좋은 건 아니라는 말씀. 게다가 이번 연말 연봉협상 때 연봉을 얼마나 올려줄지에 따라 내년 1월에 내가 블로그에 남길 직업 만족도도 달라지겠지 ㅋㅋㅋㅋ




2.

어떻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느냐.

우선 열심은 답이 아니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열심히 한 적은 없다. 이거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뭘 시작한 적은 많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루고자 하는 걸 잘 해내는 건 또 전혀 다른 문제고. 나는 그저 멍청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공부할 뿐이지 무언가의 끝을 보겠다고 필사즉생의 결의로 임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자랑할 일은 아니다. 잠을 아껴가며 결과를 낸 사람들 앞에 서면 대단히 부끄럽다. 

내가 일단 배포가 작다. 원대한 꿈은 없고 아주 쟉고, 구체적이면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만 세운다. 먼 미래도 내다볼 줄 모른다. 대충 2-3년 뒤쯤만 생각한다 (요즘 든 생각인데 마흔에 집을 사고 싶다는 건 원대한 꿈 같긴 하다). 그럼 어떻게든 또 다 하더라고. 

그리고 안 된 건 금방 잊는다. 포기가 좀 빨라, 내가. 다음 거 잘 하면 되지, 이번에 망친 거 담엔 안 그러면 되지, 그러는 편 (물론 날 떨어뜨린 회사는 두고 두고 기억한다).


그러면 결국 "저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는데요"라고 예쁘고 편리하게 편집된 커리어 서사를 가진 사람이 된다.




3.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연애.

최선을 다 해도, 대충 저질러도, 뭣도 안 된다. 


지지난주였나, 선생님이 "나연씨는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오히려 화가 난다고 했지만..." 이라고 운을 띄우시며 나연씨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대단한 사람이니 다시금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겨주라는 당부를 하셨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해줄 때마다 나는 "그럼 도대체 왜 나의 매력과 대단함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고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한 맘을 쏟아낸다. 그 말의 진실성을 믿지 못한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그걸 증명해 줄 근거가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선생님한테도 정색하고 반문한 적이 있지...

이쯤이면 포기할만도 한데, 또 포기는 안 된다.

 나도 다정하고 야한 사람의 다정하고 야한 애인이고 싶다. 규칙적이고 근사한 섹스를 하고 싶다고!!! 시바!!!

그냥, 이젠 분하다. 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