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2.

가끔 궁금한 사람들

 



1.

오늘 지하철에서 다운증후군 환자 두 분을 봤다. 손등과 손목의 주름으로 보았을 땐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것 같았다. 다운증후군 환자들은 비환자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다고 들었다. 20-30년 정도.

매튜 삼촌은 잘 있는지, 나를 기억은 하는지, 조금 궁금하다.



2.

사람을 왜 피부색으로 나누어 부르는 걸까. 인종 관련 이슈가 나올 때마다 black, brown, white 라는 단어만 들으면 그럼 나는 yellow인가? 나 전혀 안 yellow skin인데,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사람을 검은색, 갈색, 흰색으로 부른다는 게 너무 야만적인 게 아닌가 불쾌해진다.

그냥 인간은 인간이면 되는 거 아닌가. 유색인종이란 말도 이상해. 피부에 색이 없을 수가 있느냐고. 할로우맨이야 뭐야.



3.

너는 조금 불행했으면 좋겠어.

많이는 아니어도 조금씩 꾸준히. 미안해.



4.

미국 유학시절 짝사랑하던 친구를 얼마 전 인스타에서 발견했다. garage band를 하며 편집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Kevin은 여전히 음악을 하고 사진을 찍는 친구가 되어있더라. 한 번 제대로 만나서 밥이라도 먹어 보고 싶다. 



5.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렇게 불리는 거 싫어하는데,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쓸 때는 그냥 문장이구나, 하고 듣고 넘어간다.


올 여름에 만났던 작가님께 내 '영상남 금지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길 들은 작가님이 고백 아닌 고백을 하셨다.

"저는 예술하는 여자 좋아요. 그런 사람들하고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잖아요. 나연씨도 그렇지 않아요?"

예... 그건 그래요... 근데 그 분류에 들어가기에 저는 너무 언저리 사람인데요... 물론 저는 여전히 두 겹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좋기는 해요.



6.

관계는 식물과 같다는 말에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식물처럼 관계마다 각기 다른 최적의 생장환경이 있겠지만, 식물 키우기에 대한 정보는 어디든 차고 넘친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걸. 실제 당사자에게 어떤 걸 원하는지 묻고, 들어도, 막상 가정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사람의 반응이 예측과 전혀 다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간에 내 정원에 들어오시려거든 제발 어떤 식물인지 귀뜸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저는 반양지를 좋아하고 물은 건조하게 주세요, 라든가, 저는 직사광선도 좋아하고 과습을 모르는 식물이지만 노지월동은 어렵습니다, 라든가.


나로말할것 같으면, 직사광선 사랑하고 물은 규칙적으로 주기만 하면 잘 크는 편이지만 가끔 몸살을 앓는다. 그때는 자주 들여다봐주면 곰방 낫는다. 



2020. 10. 4.

독립과 자취의 차이

 


1.

혼자 산 지 이제 꼬박 3주가 되었다. 심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한 두 달은 지나간 것 같은데 오늘이 이사 후 맞는 고작 세 번째 주말이라니. 하루하루가 정말 너무 길었네.


간간이 연락하는 친구들에게도 독립 소식을 전하는데, 문득 현재 내 생활양식이 독립인지 자취인지 출가인지 아리까리 해졌다. 경제적측면에서 보면 독립에 가깝다. 부모 도움 없이 내 돈으로 나와 내가 세 내며 살고 있으니까. 근데 그건 본가에서 살 때도 그랬다. 엄마 쓰러지고 나서부턴 생활비의 70~80% 정도를 내가 책임졌으니까. 집안일을 게을리했다뿐이지 내가 꾸려야 하는 살림이었다. 

정서적 독립이야 애저녁에 했지. 아마 미국 가면서부터였을 거다. 비빌 언덕이나 믿을 어른 하나 없는 팔자라는 것을 진즉 깨달았고, 열아홉 이후로는 엄마가 서운하다며 화를 낼 정도로 엄마에게 무엇 하나 구한 적 없다. 엄마가 당신을 못 믿는 것이냐며 화를 내면 나는 그게 말이 되느냐, 내가 엄마를 왜 못 믿겠느냐며 엄마를 달랬지만, 엄마 말이 맞다. 엄마 말은 항상 맞았다. 나는 엄마를 믿지 않고, 정확하게는 엄마의 판단력을 전적으로 불신하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정서적 독립이 굳이 그 정도로 극단적인 감정고리의 단절이어야 한다고 볼 순 없겠지만, 어쨋든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벌써 몇 년이야 그럼.


근데 엄마는 내가 "엄마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며 엄마에 대한 애정이 정말 없겠느냐"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둘러댄 말을 믿었는지, 이번 분가를 "요즘 젊은 애들은 혼자 사는 게 유행이라니까" 나도 그 유행에 편승하는 걸로 이해했나보다. 오 마이. 


나는 그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지. 

그 집에서는 나오고 싶었다. 볕도 들지 않는 북향 집. 창을 열면 옆집 시멘트 담벼락이 보이던 집, 바닥에 누우면 습기찬 시멘트 혹은 장판 밑 곰팡이 냄새가 훅 번지는 곳, 여름엔 아무리 더워도 제습기를 끌 수 없던 곳, 그도 모자라 물먹는 하마 열다섯 개를 방 구석 구석 밀어 넣어봐도 벽에 곰팡이가 번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던 곳, 하지만 다정다감하신 주인 노부부 덕에 10년 내내 보증금도 월세도 올리지 않고 살 수 있던 우리집 아닌 우리집. 

대신 왕십리에는 평생 살고 싶었다. 대학때부터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난 독립해도 왕십리에 집을 얻을 거라고. 첫 직장에 다닐 때도 그랬다. 그때 나왔어야 했는데, 뉴타운이 생긴 뒤로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전세라곤 5평짜리 오피스텔뿐이었다. 5평. 지금 얻은 아파트의 절반 크기, 그러니까 지금 침실 겸 거실로 쓰고 있는 이 방 안에 주방이며 화장실, 붙박이장까지 모두 들어차 있는 방. 원래 지내던 방보다 실사용 면적이 더 좁아보이던 그 협소 주택(도 아니고 방). 그런 곳에서 살 순 없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났다(고향이 뭐 별건가. 왕십리에서 나고 자랐으니 거기가 내 고향이지 뭐). 내 의지가 아니었다. 부동산 가격 때문이었고, 도저히 함께 살 틈을 주지 않는 엄마 때문이었다. 


집을 나오는 데 있어, 그리고 이 집을 선택함에 있어 내 의지가 차지하는 몫은 얼마만큼일까? 한 40%?


3주간 혼자 살며 느낀 점은 그거다. 나는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적어도 향후 10년은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나는 혼자 살아내기엔 외로움에 몹시 취약한 사람이다. 그럼 왜 굳이 굳이 회사에서도 한 시간, 본가에서도 40분, 심심하면 나가 놀던 성수, 을지로, 광화문과도 40분 이상 떨어진 여기 와 살고 있느냐고?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싶어서. 그런데 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곳이 이정도라서. 


갓 대학 새내기가 되었을 때, 자취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 에 대한 그리움도, 등록금도 모자라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 부쳐주시는 부조님에 대한 미안함도, 고향을 떠나온 적 없으며, 부모는커녕 편모의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었던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냥 멍청하게 마냥 부러웠지.


분가 후 첫 주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너무 어마무지한 사고를 저지른 게 아닐까, 이 집 월세를 밀리지 않고 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또 돈을 모아 다음 집은 전세로 나갈 수 있을까? 마흔 전에는 대출을 끼고서라도 서울에 내 집을 얻을 수 있을까? 다시 왕십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많은 돈을 다 어떻게 모으나? 

그 염려와 불안에.


불안증 환자가 뭐 별 수 있나. 그래도 매주 친구들 부르고 모으고 목공가고 물건 사고 식물 돌보고 야근하며 피쳐 런칭하고 어쩌고 하다보니 먼 미래 걱정은 그만 해야겠다 싶었다. 월급도 무사히 들어왔구 뭐. 연말에 연봉 협상도 있으니까. 그때 되면 월 수령액 앞자리도 바뀔테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잔다. 맨날.



독립이든 자취든 분가든 출가든, 외로운 것만 빼면 몹시 잘 지내고 있다. 어제 다녀간 수진이와 헤임달 말로는 이젠 좀 사람 사는 집 같단다. 물건들이 얼추 제자리를 찾아서 그런 거겠지. 


나도 여기가 내 자리일까. 왕십리 그 어둡고 눅눅한 그 집 말고, 눈이 부셔 8시면 자동으로 기상하게 되는 11층 사슴의 집, 여기가 내 자리일까.



2.

분가 생활의 몇 가지 단상

1) 장조림

최애 반찬 한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당연코 장조림이다. 메추리알 말고 삶은 달걀을 넣은, 돼지고기 말고 소고기 장조림. 가장 익숙한 맛이면서 가장 그리운 맛이고 가장 질리지 않는 맛. 생각해보면 나는 소금간을 하는 음식보단 간장으로 맛을 맞추는 음식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간장은 소금보다 달큰하고도 깊고 복잡한 짠맛이니까 그런 것일지도. 

여튼 집 나오고 거의 매일 요리중이다. 내가 입이 짧은 게 죄지만, 손님이 와서, 어제 저녁에 먹을 걸 오늘 점심으로 또 먹긴 좀 그래서, 새로운 걸 하고 또 한다. 그래도 요즘 야근이 잦아서 뭘 오래 재우고, 조리고 하는 건 잘 못했는데 추석이라 그런지 마트에 이런 저런 고기 부위가 싸게 나왔고, 사태를 보니 장조림을 해먹어야겠다 싶어진 것. 

고기를 산 다음 날, 홍대에 나와있다던 종길쌤(한식 전공자)을 찾아가 장조림 만들기는 어렵냐 물어봤다. 가지런히 길이와 폭 맞추어 자르고 장식하는 구절판에 비하면 장조림은 쉽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소량의 고기와 ㅋㅋㅋㅋ 달걀 10개로 장조림에 도전했다.


중간 중간 이게 저맛이야 이맛이야? 하면서 간을 헤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 무척 맛있게 잘 먹고 있다. 늘 먹는 간보다는 살짝 짜지만, 그래도 반찬이니까 괜찮아, 하며 밥을 두 공기씩... 먹고 있다...

맛은 있지만 그래도 어려서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안 난다. 고기가 달라서 그런가. 담엔 홍두깨나 양지로 해볼까. 




2) 28cm의 웍

집 나가겠다 선언하고, 계약까지 하고 와서 집에서 거의 뭐 불효막심한 썅년 취급을 받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은 엄마의 걱정어린 관심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 징표로 받은 것이 28cm짜리 웍이다. 

28cm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겠지? 본인의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길이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2-3cm를 하면 웍의 지름이 된다. 그리고 깊이가 한 10cm? 그건 반뼘정도. 그러면 물이 한 2L 좀 더 들어가려나? 떡볶이 한 8인분은 할 수 있을 걸? 혼자 밥 해먹고 사는 사람은 닭도리탕을 끓일 게 아니면 거의 필요가 없는 사이즈의 조리도구인 셈이다.

나 먹겠다고 아무도 안 먹는 재료를 사다 지지고 볶는 건 열아홉때부터 질리도록 해서 1인분의 사이즈를 아는 나는 굳이굳이 그 웍을 손에 쥐어주는 엄마에게 살짝 짜증을 냈다. 


아니, 혼자 사는데 이렇게 큰 웍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집도 조그마한데.


엄마는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며 같은 크기의 프라이팬까지 싸주길래 한사코 거절하며 그럼 웍만 가져가겠다고 묵직한 쇳덩어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you know what? 엄마가 억지로 들려보낸 그 거대한 웍은 내가 여태 가장 자주 꺼내 쓴 조리도구 중에 하나다. 내가 손이 큰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 웍은 왜 이리 그릇장과 스토브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가 생각해보니 내가 집에 자꾸 사람을 불러들여서 그런 거다. 못해도 한 명, 보통은 두 명이 짝으로 오는 식이라 밥이든 반찬이든 최소 4인분 정도는 준비해야 하니까 결국은 본가에서 쓰던 사이즈의 조리도구들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엄마가 맞았다. 쫌. 쫀심 상하네.




3) 세탁기

내가 집을 나오기 일주일 전, 우리집 세탁기가 고장났다. 몇번째 고장인지 모르겠다. 수리기사님이 오실 때마다 습기 때문에 기판이 녹슬어서 그렇다는데, 아니 물로 돌아가는 가전제품이 습기때문에 고장이 이리 자주 난다고 하면 그건 그냥 기계를 잘못 만든 게 아닌가?

그렇다고 수리비가 저렴한가? 절대 아니다. 고장이 날 때마다 메인보드를 갈아야 한다고 해서 출장비까지 포함해 13만원 가량 들었다. 그건 누가 내? 내가 내. 하 씨.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은은한 꽃무늬가 몸체 사면에 수놓인 대우 세탁기는 우리가 그 눅눅한 집으로 이사가던 2010년에 이모가 사준 것이다. 당시에 한 30만원 주고 샀던 걸로 기억한다. 10년 전에 30만원이면 사실 저렴한 세탁기는 아니었어. 왜냐면 내가 이번에 분가하면서 산 12kg짜리 LG 통돌이 세탁기가 36만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성능이 좋았느냐? 그건 또 모르겠다. 흰 셔츠를 빨면 손목이나 목깃에 때가 잘 지지 않을 때가, 잦았다고 쓰려다 생각해보니 한 번도 완벽하게 깨끗했던 적이 없었네. 일수였다. 탈수가 시작될 때는 덜덜덜 떨며 곧 화장실 문 앞까지 진격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세탁기를 10년 썼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도 적어도 3번은 수리를 했으니 수리비가 세탁기 비용보다 더 나왔던 것. 


하지만 이번에도 대우 세탁기를 샀더라. 이번엔 동생이 샀다. 난 어차피 분가할 거니 n빵 대상에서 제외된 것. 동생 예산에서 살 수 있는 동급 동량의 세탁기는 하이어 아니면 대우인데, 하이어를 사긴 찜찜하니 대우를 골랐겠지. 그 친구는 2010년생 친구에 비하면 좀 덜 시끄럽고 안정적인 것 같긴 하다만, 글쎄 뭐, 난 그 세탁기를 한 번 밖에 못쓰고 집을 나왔으니 제대로 된 성능이나 안정성은 알 수가 없다.


사슴의 집에는 12kg LG 세탁기가 있다. 용량도 큰데 사이즈가 앙증 맞아 뚜껑이 안 열린다는 둥, 수도꼭지가 어쨌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앙증맞다. 

세탁기는 10년씩도 쓰는 물건이니 꼭 삼성이나 LG를 사라던 주변의 조언대로 (처음엔 삼성 세탁기를 샀다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치 직전에 기사님께 반품당하고) 이틀만에 골라 사흘만에 배송받은 나의 LG 세탁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침착하다. 세탁기란 게 소음 없이 상하좌우로 들썩거리지 않으며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낼 수 있는 기계였단 말인가, 매번 놀라면서 어디 남은 빨래가 없나 두리번 거린다. 자꾸 돌려보고 싶거든. 그리고 우리집에 있던 그 낡은 대우 세탁기를 떠올린다. 별 기능도 없으면서 뻑하면 기판이 나가고 버튼이 눌리지 않아 모든 옷감을 표준 코스로 돌려야만 했던 대우 통돌이 세탁기. 10년간 기술이 발달한 것인지, 아니면 10년 전에도 LG세탁기는 이랬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대우가 최선이었던 우리집은 앞으로도 대우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생활이 계속 되는 한 이 고요한 세계와는 분리된 채로 살아야하는 것이겠지.


난리법석 떨지 않으면서 의젓하게 제 할일을 하는(심지어 셔츠에 때도 잘 지워짐. 근데 이건 내가 산 액체세제 세탁력인건가?) 내 세탁기를 볼 때면 죄책감 비슷한 마음에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진다. 이걸 나 혼자만 알아도 되는 건가. 이런 편리한 세상을 우리 가족은 모르고, 나만 누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세탁기가 뭐라고 이런 생각까지 드나 싶다가도, 혼자 비싼 세제 들여놓고, 워런티 10년 보장해주는 브랜드의 백색가전을 이틀에 한 번씩 돌리며 신나하니, 언제나처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양극으로 찢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 가족의 계층과 내가 속한 계층의 괴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학력에서 조금씩 벌어졌던 간극은 이제 생활의 아주 작은 구석으로 번지고 있다. 소득은 물론이거니와 관심있게 지켜보는 분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외식할 때 고르는 식당과 메뉴, 듣는 음악, 사용하는 단어, 매일 같이 쓰는 그릇이나 가재도구, 살림살이, 가전제품까지, 교집합이 점점 줄어든다. 어떻게든 이 굴레를 벗어나려는 자의에 의해서, 그리고 변화를 구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의 타의에 의해서. 


분리되고 싶으면서도 내가 적극적으로 분리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에 죄책감이 든다. 배신자 혹은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한 년 취급을 받는 것이 억울하면서 화가 나다가도 또 속상하고.



세탁기 하나 놓고 별 잡생각을 다 한다. 이런 게 혼자 사는 일인가보다.



4) 청소

나는 내가 이렇게 부지런한 인간인 줄 몰랐다. 본가에 살 때는 넌 왜 청소기를 안 돌리냐, 빨래를 안 돌리냐, 동생한테 허구헌 날 욕을 먹었는데 혼자 사니 하루에도 두세 번씩 쓸고 닦고, 틈만 나면 또 빨 게 없나 찾아보려고 옷이나 침구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린다. 


혼자 사니 집안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이 없어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 이 집안 모든 게 오롯이 내 것, 내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되도록이면 최초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물때가 끼지 않은 싱크대, 변기, 아직 새하얀 화장실 타일의 줄눈과 부엌의 실리콘, 얼룩지지 않은 새하얀 벽지, 맨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베란다 타일 같은 것들. 이사 나가는 날까지 지금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그러려면 뭐 자주 쓸고 닦고 덜 어지르는 수밖에.


그래도 놀러온 친구들마다 이젠 좀 사람 사는 집 같다, 집이 너무 예쁘다, 깨끗하고 밝다, 좋은 말 많이 해줘서 청소할 맛이 난다. 자주자주 논노오세욤 열분🖤





2020. 9. 27.

tmi

 



오늘 하루가 길다 못해 지리멸렬하기까지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하루 일과와 tmi를 늘어놔야 속이 편하겠다 싶어 블로그를 열었다.

요새 블로그 또 자주 오네. 이거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닌데.



1.

스타트야 좋았지. 여기를 방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거실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 침실로 쓰고 있는 공간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이 무지무지 크다. 4쪽자리 문이 3중으로 서 있는데, 거의 통창이라, 채광이 정말 끝내준다. 사실 이 집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곰팡이가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햇빛이 통째로 들이닥치는 집. 


아니 근데, 잠을 잘 수가 없자네...


이전 방은 북향이었고, 사는 내내 암막거튼을 치고 살아서 (여름에도 추운 방이었거든) 나는 아침햇살이 핸드폰 알람보다 강력한 모닝콜인 줄은 평생 몰랐네. 

커튼을 달아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집에 올 때까지도 커튼 레일은 오지 않았고, 커튼도 다 고르지 못해서, 그 사람이 집에 또 와줄지 어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하이고 모르겠다, 나는 망했구나, 그냥 이대로 살까, 했는데

이번 주 내내 날씨 짱 좋았던 거 알지? 그래서 내가 아침마다 어땠겠어? 

오늘은 심지어 아침 8시도 안 돼서 깼다. 일요일에!!!!!!


그래도 오늘은 목공가는 날이니까, 트롤리 조립하는 날이니까, 잘됐다, 일찍 깬 김에 어제 산 바이닐 틀어놓고 청소하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신나게 공방에 갔다. 유월이의 격한 뽀뽀와 환영 인사를 받고 바로 조립을 시작했고 (담주는 추석이라 못 가니까) 담엔 대패 밀고 바퀴만 달면 끝날 수 있게 최대한 마무리를 짓고 나왔다.

시계를 보니 5시 10분 전.



2.

어제 김밥레코드에 갔는데 찾는 음반이 없었다. 대단한 걸 찾는 건 아니고 맥밀러랑 her, sza, electric guest, daniel caeser를 찾는 것뿐인데 시발 다 없어. 다 없대!!!!! (김밥레코드는 짱입니다. 사실 HAIM 앨범은 살라고 그랬거든? 진짜 김밥레코드엔 원래 없는 게 없어요 여러분. 싸고, 여튼 짱이야)

그래서 한남동 현대카드 거기에 전화를 했더니 sza는 있다더라? 근데 자기네 6시면 닫는다고 (전화한 건 토요일 오후 5시 58분) 내일 오시래. 그래서 갔지. 

갔더니 또 QR코드 찍고 대기 번호를 받으래요. 나는 263번, 대기인원 42명. 거기 도착한 게 5시 20분이었나? 하아... 왜 이르냐...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고 15분만에 입장해서 빛의 속도로 디깅을 시작했는데, 어라 없네?


결국 직원분께 가서 찾는 앨범 5장, 근데 그거 다 없다니까 또 생각난 거 추가 2장 문의를 드렸더니 sza는 방금 나간 것 같대. 나머진 들어올 예정이 없고. 하아.................. 



3. 

빈손으로 터덜터덜 앤트러사이트를 향해 걸었다. 이솝 들러서 바디로션 좀 사야지 했는데, 아니 이게 모람???? 9/1-10/7까지 내부 수리라고!?? 

건너편 논픽션까지 갔는데, 거긴 또 바디로션에서 향이 안 나. 아오.

비이커에선 진짜 너무 맘에 드는 디자인과 향과 발림성의 바디로션을 발견했지만 108000원. 나는 내가 0을 하나 더 붙여서 읽은 건가? 하고 봤는데, 아니야 십만 팔천 원 맞아. 음. FRAMA. 기억만해둘게. 



4.

종일 목공하고, 대기하고, 뒤적이고, 오르내리며 허탕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혼자 밥 먹긴 또 죽어도 싫어서 대충 도너츠나 먹고 집에 갈까 싶어 올드페리까지 꾸역꾸역 갔더니 솔드아웃이래. 음 오늘 우주가 나에게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의 고난을 주는 날인가... 다시 앤트러사이트까지 빠꾸. 결국 마들렌이랑 진저밀크 미친 사람처럼 흡입하고 집에 왔다.



5.

내가 tmi를 적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사실 올드 페리에 가던 길이었는데, 왜냐면 도넛이랑 우유가 들어간 아무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지하철 가는 길에 냠냠 야무지게 먹으면 시간이 딱 맞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거든.

유교걸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나는 길에서 먹는 걸 좋아한다. 길거리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길에 가만히 서서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on the go 상태로, 걸으면서 무언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 왜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신이 나. 어딘가 향해 가는 것도 신이 나고, 그 길에 맛난 걸 먹으며 걷는 데 소비되는 에너지를 바로바로 보충할 수 있다는 것도 신이 나. 그리고 걸으며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라면 날씨가 대체로 좋다는 얘기거든. 그럼 뭐 말 다했지. 왼손에는 도너츠나 까눌레 같은 걸 들고, 오른손에는 차가운 우유를 쥐고 양손 번갈아가며 먹고 마시면, 아이고 행복이 별거냐. 

그게 아니라면 식당이 아닌 어딘가의 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것도 좋다. 잔디밭, 공원 벤치, 남산과학관 올라가는 계단참, 그런 곳. 주변으로 행인도 없고, 식당도 없지만 어딘가로 가는 길목에 퍼져 앉아서 별 생각 없이 무언가 우걱거리며 거리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좋다. 이럴 땐 누가 같이 있어야 좋다. 혼자 그러는 건 좀 별로. 걸으면서 먹는 건 혼자해야 신이 나는데 (둘이 같이 그러면 상대방한테 미안하다. 뭔가... 내가 막 보채는 느낌이랄까) 걷다 말고 주저앉아 먹는 건 둘이 해야 신난다. 어디 야외 간다고 하면 바로 돗자리부터 챙기는 이유.



6.

집에 와선 손톱과 발톱을 잘랐다. 나는 그래도 여유를 좀 두고 자른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내 손이나 발을 본 사람들이 그러더라. 손발톱을 굉장히 바짝 깎네요? 라고. 그런가? 근데 손톱이 3mm이상만 자라도 거슬리기 시작한다. 5mm다, 그럼 뭐 바로 손톱깎기 대령이지. 손톱에 뭐 칠하는 것도 안 좋아한다. 발톱은 여름에만 한두 번 정도. 그냥 맨손이 좋다. 조약돌처럼 동그랗게 잘 정돈된 손끝이 좋다. 매트하게 광이 도는 살구색 손톱이 좋다. 



7.

오늘의 tmi는 여기까지. 바이닐은 아무래도 직구해야겠다. 스위밍은 죽어도 안 들어올라나보다.





2020. 9. 25.

실제 근황

 



오늘 갑자기 뭔가 tmi 같은데 진짜 제대로 된 근황을 적어두고 싶어서 하루만에 블로그에 다시 들어왔다.


근황 1.

굳섹스가 도대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 것만 빼면 대체적으로 잘 지내는 것 같다.


근황 2.

위 문장을 곱씹어보다, 아 올 초에 있었지, 하고 안도?했다가 다시 슬퍼짐.


근황 3.

다들 잘 하고 살아? 나만 슬퍼? 어?


근황 4.

연말에 두 번째 연봉 조정이 있다. 서른 다섯전에 연봉 7000 받는 사람 되고 싶은데, 그건 이직을 안 하는 이상 어렵겟지... 근데 난 울 회사 좋은데. 아직 배울 게 산더미고.


근황 5.

듣는 귀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왜이리 어려운가? 그리고 그게 귀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왜이리 적고. 어제도 사실 같이 듣고 보고 싶었던 영상 리스트가 있었는데 술 취해서 그거 다 까먹고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혼자 틀어놓고 일함.


근황 6.

내 살냄새가 자꾸 떠올랐으면 좋겠어. 

머리칼의 감촉, 살결, 말캉한 혀, 볼이 닿았을 때의 온기, 허벅지의 단단함, 그런 거 전부. 그보다도 살냄새. 그래서 못참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못 돼먹지 못했지.


근황 7.

요즘 좋아하는 뮤지션님과(영어단어 뒤에 님을 붙이니까 넘 이상한데 어쩔 수 없어. 캡틴님 같잖아?) 소소한 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이나, 그 과정에서 앨범 발매 계획 얘기를 미리 듣게 된 일이나, 아주 오래 좋아했던 사진 작가님께 사실은 팟캐에 ㅇㅇ을 촬영한 작가님이라며 사연을 소개할 때 단박에 작가님인 거 알고 너무 반가웠고 아는 척 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라방에서 당사자에게 하게 된다거나, 근데 그 작가님이 바로 다음날 내 친구와 프로젝트로 만나서 출장을 가게 된다든가, 개인적으로 만나 뮤지션임을 뒤늦게 알게 된 동생의 싱글이 또 나왔다든가, 그런 소소하고도 거대한 일이 이번주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우울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도와준 우주에게 이번주는 조금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아래층 싸이코의 층간소음 민원도 없었고...


근황 8.

행복하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지만 불행하진 않다고 오래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근황 9.

그냥 9까지 써보고 싶었다. 간만에 솔직한 얘기 한 것 같아서 글 멈추기가 아쉽네. ㅎㅎ





2020. 9. 23.

 


올해 초에 누굴 아주 짧게 만났다. 알 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 애 집에 3박 4일을 눌러 앉아 있었는데,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 날 문자로 그러더라.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하면서 청소하고 있어.



오늘 베개 먼지를 털다, 이불을 정리하다, 바닥을 쓸다, 그 문자가 생각났다.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칼을 줍던 네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 방에 너를 혼자 남겨두고 나오던 날 내 마음이 더 시렸을까, 

혼자 남아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던 네 마음이 더 시렸을까?




다프트 펑크가 아닌 Random Access Memory

 

 

다펑 Random Access Memory가 나온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더라.

어제 생각난 김에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앨범 발매 되는 날 손꼽아 기다렸다가 Lose yourself to dance에서 오열하고 Get lucky만 나오면 막 온몸이 간질거렸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리고 그 해가, 내가 힙스터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던 시기. 힙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기. 


고하고, 

그땐 앨범 제목 한번 랜덤하네. 임의 접근 메모리는 뭐야? 뭘 랜덤하게 접근한단 거지? 했었는데

어제 보니까 RAM 이더라. 컴퓨터 메모리 RAM. 

문과생으로만 살 땐 모르다, IT 인이 된 지 9개월차, 이제는 주변의 사물들이 다르게 보이거나, 있는 줄도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한다.


회사 들어오고 정신이 없어지면서 블로그도 안 해서 지금 보니 마지막 글이 2월인데,

놀랍게도 회사 만족도는 여전히 90%다. 배워보고 싶은 분야의 일이라서, 기계의 언어도 결국은 외국어인지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재미나서, 회사에 훌륭한 동료가 너무 많아서, 회사가 아낌없이 지원해줘서, 나는 이정도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줘서, 너무 좋다.

재택근무도 7개월차니, 뭐, 적응하고도 남았지.



두번째 기계식 키보드를 사고, 다펑의 RAM을 다시 보게 되기까지 벌어난 일들 중 사실 가장 turning point가 되는 건 독립.

드디어 집에서 벗어났다. 가족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내 공간을 갖게 되었다. 한정된 공간에 맞춰 물건을 테트리스처럼 욱여넣는 방이 아니라, 공간에 목적을 두고 그에 맞춰 가구를 배치하고 꾸미고 색을 입힐 수 있는 내 공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clean slate. 아직 집이랑 데면데면한 것도 있고, 아래층엔 층간소음을 호소하는 남성 싸이코가 사는 탓에 이제 여기가 우리집! 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지만, 그래도 너무 붕 뜬 느낌은 아니다.

초반엔 아빠 마이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엄마 치마를 두르고 나다니는 기분 정도라고 하면 아무도 못알아듣겠지. 젠장.


내 집, 내가 세대주인 곳이 생겨 좋은 점은 친구들을 불러 맛난 걸 해먹일 수 있다는 것. 매일 볕도 들지 않고 창도 없는 어두운 부엌 겸 거실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남으면 다 버려야 했던 메뉴들을 이젠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과 눈이 부실만큼 해가 잘 드는 거실 겸 침실(?)에서 나눌 수 있다. 

어젠 커튼 달아준 친구랑은 노을 질 때즈음부턴 불도 다 끄고, 베란다 방충망까지 다 열어제끼곤 멍하니 하늘 구경을 했다. 이사온 지 열 하루 만에 처음 조용히 앉아 베란다를 내다본 날이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혼자 와인 한 병을 싹 비웠더라고. 


이런 게 하고 싶어서 독립한 건 아니지만 독립하면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게 너무 좋다.


한 가지 좀 걱정되는 건 자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어진다는 거.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라고 다들 그러지만 나는 콩알만한 방에서20년 가까이 살던 사람이라 집 하나를 혼자 통째로 쓰자니 밤엔 작은 방에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고, 거실 겸 침실은 너무 허전하고, 아래층 싸이코만 층간소음이 있다는데 막상 우리집은 옆집 윗집 너나 할 거 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밤이면 그 적막함이 공포로 몰아친다. 잦다. 낮에 같이 있는 것도 너무나 좋지만 밤에 같이 있을 사람이 더욱 간절해지는 2020년 9월.



저는 잘 지내요.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오지 않으시겠다 하실 것 같아 지레 체념합니다. 여전히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스트레스 받고 계실 것 같아 건강하지 않으시겠죠. 여전히 같이 사시나요. 하긴, 제가 궁금해할 문제는 아니네요. 그래도 제가 잘 있나 진심으로 궁금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집에도 한 번 오실래요? 우리 한 번도 한 적 없는 거 한 번 해요. 환한 곳에 마주 앉아 밥 한 끼만. 그것만 해요. 



2020. 2. 23.

문과생은 키보드를 사지 않지






IT 회사에 다닌다는 걸 티내고 싶어 진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키보드에 엄청 꽂혀 있다.

사실, 발단은 이렇다.
대학원 들어가기 전부터 손목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고, 핸드폰을 바꾼 후로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심해져서 이제 양쪽 손목 모두 시큰시큰 저릿저릿인데... 
버티컬 마우스로 바꾸고 핸드폰들 손바닥에 올려두고 손목 스냅 주지 않고 써 봐도 통증은 그대로였다.

세상에 사무직이라면 누구든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테지만
정말 하루 온종일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너무 괴로워서 컴퓨터를 더욱 멀리하고, 컴터와 멀어지다 보니 당연히 글을,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꾸 손목 보호대, 쿠션, 받침대 등을 사들이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사무실 옆자리에 계신 ㅈ가 자신의 키보드를 한 번 써보라고 건내주셨다. 그니까 이거 쓰세요, 는 아니고 이거 한 번 눌러보세요, 훨씬 타자치기 편할걸요?, 하는 의미로 잠깐 빌려주신 것.

오오오 신세계.

뭔가 부드럽게 눌리는 게, 키보드의 키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꾹꾹 눌러대지 않아도 글자가 입력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별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지???

아니 이것이 UMC가 그토록 열변을 토하던 기계식 키보드란 것인가?!?!?
왜 나는 이 세계를 몰랐지!?!


깨달음의 충격도 잠시, ㅈ의 말에 의하면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기계식 키보드를 쓰신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엄청난 헤비 타이핑 워커이긴하지. 

생각난 김에 다들 뭐 쓰시는 지 함 볼까, 하고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데, 우리 사무실 엔지니어분들은 두 분 빼고 모두 기계식 키보드를 쓰시더라 (그 두 분은 애플 매직키보드+터치).
와, 뭔가, 억울한 기분. 이런 멋진 문명의 혜택(?)을 나만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ㅈ의 키보드는 거의 30만원짜리였고 (회사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사셨다고. 사실 나도 그 웰컴 버짓이 남아서 그걸로 사려고 했다) 그보다 좀 더 저렴한 키보드 중 유명하다는 ㄷ사의 모델을 추천해주셨다. 근데 디자인이 약간 별로더라고?

그래서 또 미친 듯이 서치를 시작, 반쪽으로 쪼개지는 키보드를 사기로 했다.
이전에 버티컬 마우스를 찾다가 AI의 추천에 따라 자연스럽게 ergonomic(인체공학) 키보드를 보게 되었는데, 분리형 키보드는 그때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다소 생소한 디자인이기도 했고, 뭐 키보드가 이렇게 벌어진다고 해서 뭐 좋은 게 있겠어? 하고 깔끔하게 무시했다.

막상 키보드를 사려고 (후기를 미친듯이)보다 보니, 분리형을 쓰시는 아주 소수의 분들께서 "라운드 숄더와 손목 통증이 많이 좋아졌다"는 식으로 리뷰를 남기셨더라.

라운드 숄더와 터널 증후군, 경추 디스크, 거북목, 골반 틀어짐 등 온갖 관절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본인은 이 리뷰를 보자 마자 이것은 나의 이야기잖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뒤지고 뒤지다 mistel MD600 저소음 적축 RGB모델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


지금 이 글도 그 키보드로 쓰고? 치고? 있다. 아씨, 너무 좋아.
판매처가 많지 않고, 리뷰도 정말 드물어서 약간 고민을 했었는데, 일단 KINESIS보다 디자인 측면에서 훨씬 나았고(키네시스도 분리형 키보드가 유명하더라고요?), 직구를 하지 않아도 됐고, 내게 남아 있던 웰컴버짓 금액과 가격이 비슷해서 골랐다 (얘도 싸진 않았다. 20만원 선).



결제를 다 하고 (사실 다른 기계식 키보드도 하나 더 삼, 걔는 블루투스 지원됨) 너무 신나서 옆자리의 ㅌ과 ㅋ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더니, ㅌ은 "ㅋ는 몇 십 만원짜리 키캡 있어요" 라면서 ㅋ의 키보드 사랑을 알려주시는 것. "키켑에 막 큐빅이라도 박힌 거예요???? 어떻게 ##만원이나 해요?!?!?!" 했더니 ㅋ는 아주 자랑스럽게 직접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셨다. (엔지니어분들의 특징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뭘 여쭤보면 바로 링크를 쏴주시거나 구글에서(무족권 구글) 이미지를 찾아서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신다. 나랑 내 친구들은 줄줄이 글로 쓰거나, 네이버 블로그 리뷰 링크 쏴주는 정도인데.)

ㅋ는 "집이랑 본가에 있는 키보드까지 합치면 한 대여섯 개 될 거예요" 라셨고, "그게 다 달라요? 아, 음, 그러니까 그게 다 사용 용도가 다른 거예요?" 라고 토끼눈을 하고 묻자 "그럼요! 다 다르죠! 키감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고. 사무실에서 쓰는 건 텐키리스(숫자패드가 없는 배열)인데다 조용해서 사무용으로 딱이에요. 화려하고 큰 건 이제 집에서 쓰죠. 게임할 때라든가." 하시는 것.

키보드가 6개씩이나 필요할 수 있다니(혹은 6개씩 살 이유가 있다니) 놀라운 마음에
"저도 사실 그래서 사무용이랑 집에서 쓸 거 하나 더 샀어요. 원래 집에서 5,000원 짜리 다이소 키보드 썼거든요. 근데 넘 힘들더라고요" 하며 나의 고충을 토로했다.

ㅋ는 "네???? 다이소요???? 다이소에서 키보드를 판다고요??? 것도 5,000원이요??????" 라며 나보다 더 놀라시는 것. 무엇보다 어떻게 5,000원짜리 키보드를 쓸 수가 있어요!!! 같은 충격의 표현이었던 듯.

나는 그조차 노트북 스탠드를 사면서 노트북 키보드를 쓸 수 없어지자 궁여지책으로 급하게 사서 썼던 것인데, 흑흑. 스탠드 때문에 노트북 높이가 올라가지만 않았어도 (사실 한 동안은 스탠드에 올려놓은 채로 굉장히 이상한 자세에서 타이핑 했었다) 난 키보드 따위는 사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ㅋ는 키보드 사는 돈 이외에는 사실 자신은 소비할 곳이 없다시며 나에게 키보드를 사지 않으면 뭘 사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ㅋ, 문과생은 키보드 같은 건 사지 않아요... 그냥 사무실에서 주는 걸 쓰죠." 라고 말하고 웃었다.




사무실에서 종종 엔지니어분들과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두 세계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문과생의 세계와 공대생의 세계 가운데 놓인 강이나, 지질단층 같은 것이랄까...
물론 문과생이라고 다 키보드 따위에 관심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공대생이라고 모두 키보드는 기본 6대라고 일반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체적인 성향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게 있다. 문서 작성이나 업무 요청 시 설명 방식, 취미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캐치하게 되는 귀여운 발견들.



여튼, 이렇게 긴 글을 썼는데도 손목이나 어깨가 아프지 않다. 물론 이 키보드는 60% 배열이라 화살표 키도, 홈, 엔드, 페이지 업 앤 다운 키, 딜리트 키 등 넘나 많은 기능용 키가 없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fn키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움 이 있지만 불도 들어오고(색감 조정도 막 한 60단계는 되는 듯) 프로그래밍 해서 매크로 설정도 가능하고(내가 이런 기능에 감탄하게 될 줄이야), 넘 조그맣고 귀여워ㅠ 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

가끔 이렇게 20년 문과생의 IT 회사 근무일지를 써 봐야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러분, 적축 키보드를 사시라!! 
미스텔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