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3.

다프트 펑크가 아닌 Random Access Memory

 

 

다펑 Random Access Memory가 나온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더라.

어제 생각난 김에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앨범 발매 되는 날 손꼽아 기다렸다가 Lose yourself to dance에서 오열하고 Get lucky만 나오면 막 온몸이 간질거렸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리고 그 해가, 내가 힙스터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던 시기. 힙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기. 


고하고, 

그땐 앨범 제목 한번 랜덤하네. 임의 접근 메모리는 뭐야? 뭘 랜덤하게 접근한단 거지? 했었는데

어제 보니까 RAM 이더라. 컴퓨터 메모리 RAM. 

문과생으로만 살 땐 모르다, IT 인이 된 지 9개월차, 이제는 주변의 사물들이 다르게 보이거나, 있는 줄도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한다.


회사 들어오고 정신이 없어지면서 블로그도 안 해서 지금 보니 마지막 글이 2월인데,

놀랍게도 회사 만족도는 여전히 90%다. 배워보고 싶은 분야의 일이라서, 기계의 언어도 결국은 외국어인지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재미나서, 회사에 훌륭한 동료가 너무 많아서, 회사가 아낌없이 지원해줘서, 나는 이정도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줘서, 너무 좋다.

재택근무도 7개월차니, 뭐, 적응하고도 남았지.



두번째 기계식 키보드를 사고, 다펑의 RAM을 다시 보게 되기까지 벌어난 일들 중 사실 가장 turning point가 되는 건 독립.

드디어 집에서 벗어났다. 가족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내 공간을 갖게 되었다. 한정된 공간에 맞춰 물건을 테트리스처럼 욱여넣는 방이 아니라, 공간에 목적을 두고 그에 맞춰 가구를 배치하고 꾸미고 색을 입힐 수 있는 내 공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clean slate. 아직 집이랑 데면데면한 것도 있고, 아래층엔 층간소음을 호소하는 남성 싸이코가 사는 탓에 이제 여기가 우리집! 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지만, 그래도 너무 붕 뜬 느낌은 아니다.

초반엔 아빠 마이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엄마 치마를 두르고 나다니는 기분 정도라고 하면 아무도 못알아듣겠지. 젠장.


내 집, 내가 세대주인 곳이 생겨 좋은 점은 친구들을 불러 맛난 걸 해먹일 수 있다는 것. 매일 볕도 들지 않고 창도 없는 어두운 부엌 겸 거실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남으면 다 버려야 했던 메뉴들을 이젠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과 눈이 부실만큼 해가 잘 드는 거실 겸 침실(?)에서 나눌 수 있다. 

어젠 커튼 달아준 친구랑은 노을 질 때즈음부턴 불도 다 끄고, 베란다 방충망까지 다 열어제끼곤 멍하니 하늘 구경을 했다. 이사온 지 열 하루 만에 처음 조용히 앉아 베란다를 내다본 날이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혼자 와인 한 병을 싹 비웠더라고. 


이런 게 하고 싶어서 독립한 건 아니지만 독립하면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게 너무 좋다.


한 가지 좀 걱정되는 건 자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어진다는 거.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라고 다들 그러지만 나는 콩알만한 방에서20년 가까이 살던 사람이라 집 하나를 혼자 통째로 쓰자니 밤엔 작은 방에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고, 거실 겸 침실은 너무 허전하고, 아래층 싸이코만 층간소음이 있다는데 막상 우리집은 옆집 윗집 너나 할 거 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밤이면 그 적막함이 공포로 몰아친다. 잦다. 낮에 같이 있는 것도 너무나 좋지만 밤에 같이 있을 사람이 더욱 간절해지는 2020년 9월.



저는 잘 지내요.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오지 않으시겠다 하실 것 같아 지레 체념합니다. 여전히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스트레스 받고 계실 것 같아 건강하지 않으시겠죠. 여전히 같이 사시나요. 하긴, 제가 궁금해할 문제는 아니네요. 그래도 제가 잘 있나 진심으로 궁금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집에도 한 번 오실래요? 우리 한 번도 한 적 없는 거 한 번 해요. 환한 곳에 마주 앉아 밥 한 끼만. 그것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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