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31.

Latte is a horse




근데 말이야,
여기서는 소통 하고 싶다구...
흑흑








1.
내 과거는 나한테만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책 내고 보니 남들한테도 재미있는 얘기인거 같더라고.

그래서 걍 나 재미있는 얘기나 더 하려고.



2.
가끔 책에 나오는 누구누구는 연락 안 왔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책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과 연락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직도 내 삶에 어느 정도는 relevance가 있는 사람들.

근데 딱 한 사람, 들어가는 말에 나오는 블로그 주인, 
그 사람하곤 연락할 수가 없다. 책을 꼭 주고 싶었는데.

근데 내가 방금 그 사람을 어디서 봤는 줄 아니??



3.
PaaS나 SaaS 같은 곳에 지원하고 있는데,
이게, 하아, 잘 모르겠다. 배울 게 많은 건 너무 흥분되는 일인데, 어딘가 마음 한 켠이 좀 그래. 몬주알아?

Read this from the New Yorker:

Four Years in Startups

Life in Silicon Valley during the dawn of the unicorns.




4.
올해 읽었던 editorial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담담하게 충격적이라 프린트 해서 두 번이나 읽었다.

9/11 15주기였던 2016년에 나왔던 에스콰이어 기사.




5.
그런가 하면 요즘 밤낮으로 기다리는 뉴스레터가 있는데,
the skimm이랑 뉴닉.
뉴닉은 the skimm을 벤치마킹한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라서 둘은 레이아웃과 내용 구성이 비슷하다. 다만 the skimm은 영문 뉴스레터로 좀 더 global current affairs중심이고 뉴닉은 국내 소식.
법사위를 들어는 봤는데, 패스트트랙이 뭔지 알 건 같은데, 남한테 설명하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나같은 헛똑똑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뉴스레터다.

올해 구독하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탑2 서비스.



6.
확실히 구독을 많이 하고 있다.
언론사만 해도 뉴욕타임즈랑 뉴욕커(누가 보면 뉴욕에 한 맺힌 사람인 줄 알겠네)를 보고 있지, 그 전엔 오디오 서비스인 audm 도 했었지,
넷플릭스 보지, 왓챠 이달에 끊었고(i mean, unsubscribe), 애플 뮤직, 멜론, 아이클라우드, 어도비, MS office랑... 뭐가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이 얘긴 책에 써야 하니까 여기까지만.



What I am attuned to - 1031





Elujay (Get U, Little Thangs)
Odie (Little Lies)
Choker (Juno)
Steven A. Clark (I hate everything 너무수퍼두퍼 좋아)


super-duper 도 완전 옛날 표현이겟다.



2019. 10. 20.

What I am attuned to




제가 요즘 듣는 뮤지션들

Mac Ayres
Steve Lacy
Rejjie Snow (of course)
Loyle Carner
Billie Eilish


음악 추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




2019. 10. 18.

Update




연말까지 번역서를 끝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새 책을 내기로 했어요. 독립출판도 하나 더 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탄탄한 글을 빠르게 양산해 내는 작가는 못 될 것 같습니다. 

졸업 시험이 한 달 남짓 남았어요. 하지만 저는 취업이 더 급한 사람이라...
틈만 나면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집니다. 

기왕이면 IT 쪽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요. 파이선도 공부해볼까 하고요.

사는 게 지겨워 죽겠는 사람치고 되게 열심히 살죠?
당장 내일 죽지 않을 걸 아니까, 현실하고 타협한 거죠, 뭐.


여전히 잠을 설치고, 헛짓거리를 하고, 저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일상을 보냅니다.

다음 달이면 개정판이 나온 지 1년입니다.
이 블로그만큼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주소도 바꾸고, URL도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요, 슬슬 그건 풀어볼까 해요.


다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요.
면이 없어 먼저 연락은 못 하는 거 늘 미안하고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종종 떠올리며 삽니다. 그 마음은 알아주세요.

그럼 또 만나요 :)







1.
나 니네 집에서 음악 듣는 거 진짜 좋아했어.
귀가 비슷한 사람하고 좋은 게 좋다고 호들갑 떨고, 네 앞에선 몸치인 것 상관 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거려도 되서 좋았어.
내일은 모르는 애들처럼 새까만 방에서 음악만 듣는 그 겨울밤이 정말 좋았어. 소설 같았어.



2.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면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베이스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앞에 서면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번은 10초 정도 현관문 밖에서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다 벨을 눌렀다. 

두 번은 그러지 않았는데, 음악을 들을 때 변하는 그 애 표정을 10초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 
세상 다른 즐거움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위스키와 음악이면 된다며 덩실거리는 그 애를 보는 게 좋았다. 퓨즈가 나간 상태의 그 애를 보는 게 너무 좋았다. 

나만 볼 수 있는, 나만 안다고 착각해도 아무도 혼내지 않을 그 애 모습.

술에 취해 한껏 풀어졌을 때, 눈을 찡그리며 좋아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지을 때, 그와 동시에 존나 짱이라고 욕을 할 때,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오며 스텝을 밟을 때, 음악 세팅을 바꾸며 tmi를 읊을 때, 불꽃놀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번쩍, 터졌다. 뇌 내 시냅시스가 전기자극을 보낼 때 그런 모습이었을까. 폭죽과 폭탄의 원리는 같다. 세계가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폭파하는 불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생,

작업실 내주겠다고 했을 때, 딱 한 가지 조건만 지켜달라고 했잖아.
니 작업실 쓰는 거 아무데도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네 친구들이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나보다 했어. 알면 안 될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호의를 베푸는데 내가 따질 입장은 아닌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지.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는 허튼 소리를 한 작가를 나는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게 우주니까.

그래도 그때는 잠시 그 말을 믿어볼까 싶었어.
작업실이 필요한데 이렇게나 천사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단단한 족쇄인 줄 알면서 
도대체 그런 조건은 왜 듣겠다고 했을까.



그때도 말했지만 사실 나는 너를 무척 만나보고 싶었거든.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그런 사람이 있지 않니? 
실존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사람. 내가 바라보는 풍경 안에 존재할 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은 사람. 사진 너머, 사진 밖의 삶이 궁금해지는 사람.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완전 깰 수도 있잖아. 생각보다 얘기가 잘 안 통한다거나, 가치관이 엄청 다르다거나, 취향에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다거나.

게다가 그런 개인적 호기심을 채우고 싶다는 욕망보다 중요한 건 생계였어.
작업실이 정말 너무 필요했거든. 책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니가 무슨 조건을 내걸었더라도 아마 나는 덥썩 물었을 거야. 
그리고 장담했을 거야. 별 일 없을 거라고.

그때는 자신있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사고 치지 않을 수 있다. 
먹고사는 일은 낭만 같은 걸 허락하지 않으니까 프로페셔널하게 선 지킬 수 있다.



나는 6개월째 병원에 다니고 있어. 3월부터니까 7개월이 넘었네.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처음 떠올렸던 게 언제인지 기억 안 나. 그 정도로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거야.
네가 잠적한 게 트리거 역할을 한 건 맞지만, one way or another, 언젠가는 가야 했을 거야.

약을 먹은 지 한 달 쯤 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잡념의 고리가 끊어진 걸 느꼈어. 언제나 머릿속에 사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떠들고, 나는 그 얘기의 출처를 혹은 끝을 쫓느라 끝도 없는 징검다리를 달리는 기분이었거든. 그게 사라졌어. 한 두 다리쯤 건너면 멈춰. 징검다리가 사라져. 내가 좇던 이야기도 사라져. 

추적이 멈췄다는 걸 인지하게 됐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
보통 사람들은 평상시에 늘 이런 상태였던 거구나. 이렇게 평온한 상태로 일상을 보냈구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지겨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시기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아.


그러고 나선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어.
그때, 작업실 다닐 때, 불안해서 못견디겠다고 칭얼거릴 게 아니라 진작 병원을 갈 걸. 그랬으면 널 덜 괴롭혔을 텐데, 좀 더 나은 상태의 나를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네가 나를 질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면부지 남만도 못한 사람 취급까진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늘 나를 탓해.
남을 탓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배워서이기도 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보다 자해하는 편이 더 쉬우니까. 

하지만 살려면, 사람이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일상을 유지하려면, 그 고리도 끊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매번 일이 꼬일 때마다 자책하지 않는 사람의 삶도 궁금해.
내가 뭘 어쨋기에 이런 일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나는 이런 취급을 당해도 싼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사람이기에 일이 이렇게 됐을까, 
상대가 아니면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 사람의 삶도 알고 싶어.



그럼 너는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그랬느냐"고 태연하게 물을 수도 있겠다. 
안 그러고 싶었겠니. 정말 그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어.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네가 날 끊어냈잖니.



아는 체 보다 어려운 게 모르는 체더라.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말을 내뱉지 않도록 혀를 꽁꽁 묶어두는 게 
근거 없는 허풍을 떠는 것보다 어렵더라고.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모르던 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좀 더 최근 레퍼런스를 대고 싶은데, 나도 Latte is a horse 인가보다.


연락하고 싶을 때마다 네가 했던 얘기들이 하나씩 떠올랐어.
그리고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네 말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어.

네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말.
네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어 힘들게 했었다는 말.

작업실을 찾아왔던 손님까지.

딱 작년 이맘때쯤이었지? 
참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했어. 독하다고도 생각했고, 무섭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우월감도 느꼈어. 그 사람은 외부인이니까. 나는 문 뒤로, 안으로 숨을 수 있는 내부인이니까.
  
황급하게 짐을 챙겨 나오는 길에도, 그리고도 한참을, 그날 일을 떠올리면 모자이크처럼 말도 안 되는 감정들이 뒤섞이는데, 그 와중에도 공감은 안 됐다? 그러니까 I didn’t feel ya.

일 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 알겠어.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상념이 오갔을까. 그 문 앞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었을까. 

며칠 전 꿈 속의 내가 그랬거든. 한 계단, 한 층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따져 묻고 화를 내고야 말겠다는 악이 복잡하게 엉켜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왔어. 그렇게 용기 내 가봤자 아무 말도 못 들을 게 뻔한데.

그날, 그 문을 열어주던 그 밤, 
그때는 내가 그 자리에 서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했어. 나는 언제나 문고리를 잡은 쪽, 문 안에 서서 인상 찌푸리는 쪽일 거라고 믿었어. 이대로 쭉, 문 뒤에 숨은 너와 한 편일 줄 알았어. 
인간이 이렇게 근시안이다.



나는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배우고 자랐어.
시기, 질투, 증오가 나쁜 일이라거나 감정 소모라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게 아니라 내가 미움받을까 무서워서 그러지 못해.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어떻게 그러겠니. after all, 내 생애 받아 본 호의 중 가장 큰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인데.
너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아. 해야 할 얘기도 많아. 이유를 알고 싶다는 갈증보다 너와 대화할 수 없다는 게 가장 괴로워.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궁금해할 거야.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학하겠지.
내가 또 사람을 몰아냈다고. 



예전엔 글을 쓸 때 그런 소망을 품었어.
적어도 내 글을 읽고 재미있다고 해준 사람은 글에 나왔던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상처주지는 않을 거라고.

다 헛짓거리야. 이거.

서문에 잘 지내느냐 묻지 않았으니 잘 지내란 인사도 하지 않을게.


그럼 이만.





2019. 10. 3.





초딩도 아니고 영어 쓴 지가 몇년인데
왜 아직도 말 할 때 수일치가 안 되지?
도대체 뭐가 문제지? 왜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지? 어떡하면 좋지 증말?



2.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무슨 생각을 하냐면 혀를 잘라버리고 싶어져.
과장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신체를 훼손 시키고 싶다.
나는 이 일을 잘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당한 핑계를 만들고 싶은 걸까.


나는 내가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 느끼는 절망감이나 공포가 너무 크다.
무능함 자체보다 무능하기 때문에 나는 쓸모가 없고, 쓸모 없는 인간은 무가치하다는 굉장히 비뚤어진 사고방식이 자학을 하게 만든다. 신체적 고통으로 정신적 고통을 마비시켜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진다. 

하루는 같은 문장을 계속 틀리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한심한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 상황이 너무 짜증나서 혼자 뺨과 머리를 세게 내려쳤는데 고막에서 삐, 하고 울렸다. 고막 찢어지면 이짓거리도 못하는데, 싶어져서 멈췄다.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다.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나 자신뿐 아니라 내 주변 사람, 특히 엄마와의 관계까지 망가트렸다. 

엄마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사고 후 3년이 지났지만 비장애인의 운동 능력의 60%? 정도 밖에 회복하지 못했다. 10분이면 갔을 거리를 40분 넘게 걸어야 하고, 오르막길에선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뒤뚱거린다. 대중교통은커녕 횡단보도 조차 건너지 못한다. 엄마에게 횡단보도의 초록 화살표가 줄어드는 속도는 인생이 엄마에게서 희망을 앗아간 속도만큼이나 무자비하다.

엄마가 바깥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나서 원래도 안 좋았던 모녀 관계는 이제 거의 남에 가까운 상태로 경색되었는데, 엄마측 이유는 그저 가늠만 해볼 뿐이지만 나는 한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있는 것 같다. 공부를 하다가 깨달은 건데, 엄마의 역할 혹은 의미에 대해 입장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엄마로서든 사회인으로서든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엄마 역시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엄마가 줄 수 있는 정서적 지원, 애정, 유대감 같은 건 어려서부터 느낀 적이 없었으니 별 기대도 없었지만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보험비를 내줄 수 있느냐고 울먹거리며 부탁하는, 그러다가도 나나 동생이 자신을 무시하고 괄시한다고 문을 부실 듯 두드리며 대성통곡하며 욕을 하는, 어쩌다 내가 이른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 늘 동생 침대에 누워 유투브로 옛날 가요를 틀어놓고 잠든 척을 하는 혹은 정말 잠들어있는, 예순이 넘은 모친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대하고 느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다. 엄마에게 어떠한 신체적 변화가 생겼든, 엄마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당신 인생의 의미를 타인(나를 포함)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해나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근데 그것도 내 이기심이겠지. 나도 엄마가 바라는 이상적인 딸자식의 상은 아닐 거고,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꼭 '성숙한' 모습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그런 '성숙한' 인간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근데 정말 욕심인가?

모르겠다. 모르겠고, 모르겠는 것은 나 자신의 앞날로도 이미 숨이 막히기때문에 나는 점점 엄마라는 존재를 잊고 지내려고 노력한다. 이것도 회피.

하지만 엄마는 늘 눈 앞에 있다. 물리적으로 눈 앞에 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되지만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무척 애를 쓴다.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기도 돌린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끌어모아 집안일을 하지만 우리 집은 코딱지만하고, 집엔 밥을 먹는 사람이 없으므로, 엄마는 실내운동만으로 24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집에만 있어야 하는 엄마가 물론 당연히 안쓰럽다. 걱정 된다. 그게, 화가 날 정도다. 이게 왜 화가 나는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화가 난다.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의 박복한 인생이 넌더리치게 끔찍하고 불쌍하고, 그런데 그걸 그냥 뒀나, 왜 평생 저렇게 참고만 살았나 싶어서 화가 치민다. 

엄마도 괴롭겠지. 혼자 계단 조차 오르지 못하고 제 멋대로 힘이 풀려버리는 자신의 몸이, 딸인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삶을 애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내가, 그런 딸과 앞으로도 수많은 날을 견뎌내야 하는 자신의 삶이, 끔찍할 것이다.

알지만, 알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향후 20년간 엄마는 나의 몫이라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감과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란 자괴감의 삼중고에서 벗어나고 싶다. 눈 감고 모르는 척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알지. 내가 얼마나 끔찍한 생각을 하고 사는 인간인지를.

엄마는 나의 끔찍함은 알까. 내 주변의 끔찍함에다 그걸 이따위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끔찍한 옹졸함, 지칠 줄 모르는 자기 연민에 숨이 막히는 나의 고통을 알까. 엄마 역시 1도 가늠하지 못하겠지.

나도 역겹고, 내 인생도 역겹다.



공부 하기 싫어서 써 봤다.

이제 다시 공부해야지.



3.
지금 스벅이고 옆에 커플이 앉았는데, 각자 핸드폰으로 유투브를 볼 거면 꼭 이렇게 만나야 하는 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