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커리어에 있어서는 특히.
30대에 접어들고 나선 더 확신하게 됐다. 성인이 되고나선 해보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해보고 살았다. 그 과정이 거칠고 험난했기로서니, 결국 하긴 했다.
어제 대학원 동기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이직 제안이 왔다. 링크드인으로 일자리 제안은 심심치 않게 오는지라 호들갑 떨 일도 아니지만 내심 통번역이 아니라 다른 업무로 동기들과 같은 회사에 일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들떴다. 대우는 좋을까, 연봉은 더 주나, 잠깐 단꿈에 젖었다.
영어를 쓸 수 없는 업무였지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도 마음이 동했다. 포트폴리오도 까지꺼 준비하면 되지.
그런데 이직을 할 이유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다.
내달이면 입사 1주년이다. 입사하고 첫 달부터 지금까지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90%에 달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는데, 글쎄올시다. 이 회사가 그래. 그런 회사가 있더라고.
1-2.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데에는 분명한 장단이 있다. 나쁜 소식부터 전하자면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뗏목에 올라탄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늘 무의식 저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고 기쁜 소식이라함은 빼어난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조직이 급성장 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회사(들)에 다닐 때는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직장인의 격언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기 와선 한 달에 한 번씩은 각성한다. 서로의 사적인 정보에 대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내 문화 덕분에 다들 어떤 일을 하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알 기회가 없는데, 간혹 링크드인이나 외부 자료를 통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이력을 발견한다. 카카오나 다음, 네이버는 물론이거니와 애플이나 구글, 페이스북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있다. 회사 이름 한 방으로 단말마의 감탄사가 나오는 그들의 이력을 보자면 나의 일관성 없는 경력이 쟉고 소듕하게 느껴지는 게 우선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람들의 동료로 일한다는 사실에 고무된다.
사실 이 회사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실천되는 자율성이었다. 거창한 말만 늘어놓을 뿐 실제로 직원의 역량과 태도를 100% 신뢰하는 회사는 내 알기엔 0에 가까운데, 이 회사는 그래도 80%는 실천하고 있다. 회사가 실천하고 있다기 보다는 직원들이 일구어내는 쪽에 가깝다. 서로 끊임없이 싱크를 맞추고, 문제가 발견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해결방안을 만들어내고(이건 엔지니어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에 대해 공적으로 치하한다. 근태를 체크하는 시스템이 없어도 다들 어련히 알아서 나와 해야 할 몫을 다 하고 집에 간다. 언제 오냐 다그치지도, 벌써 가냐 눈치주지도 않는다. 뭐 개중에는 설렁설렁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여러 동료들과 일해본 바로는 내가 가장 게으른 게 아닐까 반성하게 되는 분위기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냥 그런 업무 윤리 의식을 가진 사람들만 뽑아 놓은 거겠지, 혹은 그런 업무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니 업계 탑이라는 곳에서도 일할 수 있었던 거겠지, 혼자 자문자답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데 여길 오다니?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지만). 그러곤 다시 비쥬얼 스튜디오를 켜지.
물론 이 회사도 조직이다. 행정처리가 일관성이 없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팀끼리 감정 상할 일도 벌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개인이 모였다해도 조직은 조직이기에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에러가 있다. 다 좋은 건 아니라는 말씀. 게다가 이번 연말 연봉협상 때 연봉을 얼마나 올려줄지에 따라 내년 1월에 내가 블로그에 남길 직업 만족도도 달라지겠지 ㅋㅋㅋㅋ
2.
어떻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느냐.
우선 열심은 답이 아니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열심히 한 적은 없다. 이거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뭘 시작한 적은 많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루고자 하는 걸 잘 해내는 건 또 전혀 다른 문제고. 나는 그저 멍청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공부할 뿐이지 무언가의 끝을 보겠다고 필사즉생의 결의로 임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자랑할 일은 아니다. 잠을 아껴가며 결과를 낸 사람들 앞에 서면 대단히 부끄럽다.
내가 일단 배포가 작다. 원대한 꿈은 없고 아주 쟉고, 구체적이면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만 세운다. 먼 미래도 내다볼 줄 모른다. 대충 2-3년 뒤쯤만 생각한다 (요즘 든 생각인데 마흔에 집을 사고 싶다는 건 원대한 꿈 같긴 하다). 그럼 어떻게든 또 다 하더라고.
그리고 안 된 건 금방 잊는다. 포기가 좀 빨라, 내가. 다음 거 잘 하면 되지, 이번에 망친 거 담엔 안 그러면 되지, 그러는 편 (물론 날 떨어뜨린 회사는 두고 두고 기억한다).
그러면 결국 "저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는데요"라고 예쁘고 편리하게 편집된 커리어 서사를 가진 사람이 된다.
3.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연애.
최선을 다 해도, 대충 저질러도, 뭣도 안 된다.
지지난주였나, 선생님이 "나연씨는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오히려 화가 난다고 했지만..." 이라고 운을 띄우시며 나연씨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대단한 사람이니 다시금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겨주라는 당부를 하셨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해줄 때마다 나는 "그럼 도대체 왜 나의 매력과 대단함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고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한 맘을 쏟아낸다. 그 말의 진실성을 믿지 못한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그걸 증명해 줄 근거가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선생님한테도 정색하고 반문한 적이 있지...
이쯤이면 포기할만도 한데, 또 포기는 안 된다.
나도 다정하고 야한 사람의 다정하고 야한 애인이고 싶다. 규칙적이고 근사한 섹스를 하고 싶다고!!! 시바!!!
그냥, 이젠 분하다. 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