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7.

tmi

 



오늘 하루가 길다 못해 지리멸렬하기까지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하루 일과와 tmi를 늘어놔야 속이 편하겠다 싶어 블로그를 열었다.

요새 블로그 또 자주 오네. 이거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닌데.



1.

스타트야 좋았지. 여기를 방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거실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 침실로 쓰고 있는 공간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이 무지무지 크다. 4쪽자리 문이 3중으로 서 있는데, 거의 통창이라, 채광이 정말 끝내준다. 사실 이 집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곰팡이가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햇빛이 통째로 들이닥치는 집. 


아니 근데, 잠을 잘 수가 없자네...


이전 방은 북향이었고, 사는 내내 암막거튼을 치고 살아서 (여름에도 추운 방이었거든) 나는 아침햇살이 핸드폰 알람보다 강력한 모닝콜인 줄은 평생 몰랐네. 

커튼을 달아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집에 올 때까지도 커튼 레일은 오지 않았고, 커튼도 다 고르지 못해서, 그 사람이 집에 또 와줄지 어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하이고 모르겠다, 나는 망했구나, 그냥 이대로 살까, 했는데

이번 주 내내 날씨 짱 좋았던 거 알지? 그래서 내가 아침마다 어땠겠어? 

오늘은 심지어 아침 8시도 안 돼서 깼다. 일요일에!!!!!!


그래도 오늘은 목공가는 날이니까, 트롤리 조립하는 날이니까, 잘됐다, 일찍 깬 김에 어제 산 바이닐 틀어놓고 청소하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신나게 공방에 갔다. 유월이의 격한 뽀뽀와 환영 인사를 받고 바로 조립을 시작했고 (담주는 추석이라 못 가니까) 담엔 대패 밀고 바퀴만 달면 끝날 수 있게 최대한 마무리를 짓고 나왔다.

시계를 보니 5시 10분 전.



2.

어제 김밥레코드에 갔는데 찾는 음반이 없었다. 대단한 걸 찾는 건 아니고 맥밀러랑 her, sza, electric guest, daniel caeser를 찾는 것뿐인데 시발 다 없어. 다 없대!!!!! (김밥레코드는 짱입니다. 사실 HAIM 앨범은 살라고 그랬거든? 진짜 김밥레코드엔 원래 없는 게 없어요 여러분. 싸고, 여튼 짱이야)

그래서 한남동 현대카드 거기에 전화를 했더니 sza는 있다더라? 근데 자기네 6시면 닫는다고 (전화한 건 토요일 오후 5시 58분) 내일 오시래. 그래서 갔지. 

갔더니 또 QR코드 찍고 대기 번호를 받으래요. 나는 263번, 대기인원 42명. 거기 도착한 게 5시 20분이었나? 하아... 왜 이르냐...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고 15분만에 입장해서 빛의 속도로 디깅을 시작했는데, 어라 없네?


결국 직원분께 가서 찾는 앨범 5장, 근데 그거 다 없다니까 또 생각난 거 추가 2장 문의를 드렸더니 sza는 방금 나간 것 같대. 나머진 들어올 예정이 없고. 하아.................. 



3. 

빈손으로 터덜터덜 앤트러사이트를 향해 걸었다. 이솝 들러서 바디로션 좀 사야지 했는데, 아니 이게 모람???? 9/1-10/7까지 내부 수리라고!?? 

건너편 논픽션까지 갔는데, 거긴 또 바디로션에서 향이 안 나. 아오.

비이커에선 진짜 너무 맘에 드는 디자인과 향과 발림성의 바디로션을 발견했지만 108000원. 나는 내가 0을 하나 더 붙여서 읽은 건가? 하고 봤는데, 아니야 십만 팔천 원 맞아. 음. FRAMA. 기억만해둘게. 



4.

종일 목공하고, 대기하고, 뒤적이고, 오르내리며 허탕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혼자 밥 먹긴 또 죽어도 싫어서 대충 도너츠나 먹고 집에 갈까 싶어 올드페리까지 꾸역꾸역 갔더니 솔드아웃이래. 음 오늘 우주가 나에게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의 고난을 주는 날인가... 다시 앤트러사이트까지 빠꾸. 결국 마들렌이랑 진저밀크 미친 사람처럼 흡입하고 집에 왔다.



5.

내가 tmi를 적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사실 올드 페리에 가던 길이었는데, 왜냐면 도넛이랑 우유가 들어간 아무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지하철 가는 길에 냠냠 야무지게 먹으면 시간이 딱 맞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거든.

유교걸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나는 길에서 먹는 걸 좋아한다. 길거리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길에 가만히 서서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on the go 상태로, 걸으면서 무언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 왜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신이 나. 어딘가 향해 가는 것도 신이 나고, 그 길에 맛난 걸 먹으며 걷는 데 소비되는 에너지를 바로바로 보충할 수 있다는 것도 신이 나. 그리고 걸으며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라면 날씨가 대체로 좋다는 얘기거든. 그럼 뭐 말 다했지. 왼손에는 도너츠나 까눌레 같은 걸 들고, 오른손에는 차가운 우유를 쥐고 양손 번갈아가며 먹고 마시면, 아이고 행복이 별거냐. 

그게 아니라면 식당이 아닌 어딘가의 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것도 좋다. 잔디밭, 공원 벤치, 남산과학관 올라가는 계단참, 그런 곳. 주변으로 행인도 없고, 식당도 없지만 어딘가로 가는 길목에 퍼져 앉아서 별 생각 없이 무언가 우걱거리며 거리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좋다. 이럴 땐 누가 같이 있어야 좋다. 혼자 그러는 건 좀 별로. 걸으면서 먹는 건 혼자해야 신이 나는데 (둘이 같이 그러면 상대방한테 미안하다. 뭔가... 내가 막 보채는 느낌이랄까) 걷다 말고 주저앉아 먹는 건 둘이 해야 신난다. 어디 야외 간다고 하면 바로 돗자리부터 챙기는 이유.



6.

집에 와선 손톱과 발톱을 잘랐다. 나는 그래도 여유를 좀 두고 자른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내 손이나 발을 본 사람들이 그러더라. 손발톱을 굉장히 바짝 깎네요? 라고. 그런가? 근데 손톱이 3mm이상만 자라도 거슬리기 시작한다. 5mm다, 그럼 뭐 바로 손톱깎기 대령이지. 손톱에 뭐 칠하는 것도 안 좋아한다. 발톱은 여름에만 한두 번 정도. 그냥 맨손이 좋다. 조약돌처럼 동그랗게 잘 정돈된 손끝이 좋다. 매트하게 광이 도는 살구색 손톱이 좋다. 



7.

오늘의 tmi는 여기까지. 바이닐은 아무래도 직구해야겠다. 스위밍은 죽어도 안 들어올라나보다.





2020. 9. 25.

실제 근황

 



오늘 갑자기 뭔가 tmi 같은데 진짜 제대로 된 근황을 적어두고 싶어서 하루만에 블로그에 다시 들어왔다.


근황 1.

굳섹스가 도대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 것만 빼면 대체적으로 잘 지내는 것 같다.


근황 2.

위 문장을 곱씹어보다, 아 올 초에 있었지, 하고 안도?했다가 다시 슬퍼짐.


근황 3.

다들 잘 하고 살아? 나만 슬퍼? 어?


근황 4.

연말에 두 번째 연봉 조정이 있다. 서른 다섯전에 연봉 7000 받는 사람 되고 싶은데, 그건 이직을 안 하는 이상 어렵겟지... 근데 난 울 회사 좋은데. 아직 배울 게 산더미고.


근황 5.

듣는 귀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왜이리 어려운가? 그리고 그게 귀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왜이리 적고. 어제도 사실 같이 듣고 보고 싶었던 영상 리스트가 있었는데 술 취해서 그거 다 까먹고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혼자 틀어놓고 일함.


근황 6.

내 살냄새가 자꾸 떠올랐으면 좋겠어. 

머리칼의 감촉, 살결, 말캉한 혀, 볼이 닿았을 때의 온기, 허벅지의 단단함, 그런 거 전부. 그보다도 살냄새. 그래서 못참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못 돼먹지 못했지.


근황 7.

요즘 좋아하는 뮤지션님과(영어단어 뒤에 님을 붙이니까 넘 이상한데 어쩔 수 없어. 캡틴님 같잖아?) 소소한 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이나, 그 과정에서 앨범 발매 계획 얘기를 미리 듣게 된 일이나, 아주 오래 좋아했던 사진 작가님께 사실은 팟캐에 ㅇㅇ을 촬영한 작가님이라며 사연을 소개할 때 단박에 작가님인 거 알고 너무 반가웠고 아는 척 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라방에서 당사자에게 하게 된다거나, 근데 그 작가님이 바로 다음날 내 친구와 프로젝트로 만나서 출장을 가게 된다든가, 개인적으로 만나 뮤지션임을 뒤늦게 알게 된 동생의 싱글이 또 나왔다든가, 그런 소소하고도 거대한 일이 이번주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우울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도와준 우주에게 이번주는 조금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아래층 싸이코의 층간소음 민원도 없었고...


근황 8.

행복하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지만 불행하진 않다고 오래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근황 9.

그냥 9까지 써보고 싶었다. 간만에 솔직한 얘기 한 것 같아서 글 멈추기가 아쉽네. ㅎㅎ





2020. 9. 23.

 


올해 초에 누굴 아주 짧게 만났다. 알 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 애 집에 3박 4일을 눌러 앉아 있었는데,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 날 문자로 그러더라.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하면서 청소하고 있어.



오늘 베개 먼지를 털다, 이불을 정리하다, 바닥을 쓸다, 그 문자가 생각났다.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칼을 줍던 네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 방에 너를 혼자 남겨두고 나오던 날 내 마음이 더 시렸을까, 

혼자 남아 우리 나연이 머리가 많이 빠지네,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던 네 마음이 더 시렸을까?




다프트 펑크가 아닌 Random Access Memory

 

 

다펑 Random Access Memory가 나온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더라.

어제 생각난 김에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앨범 발매 되는 날 손꼽아 기다렸다가 Lose yourself to dance에서 오열하고 Get lucky만 나오면 막 온몸이 간질거렸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리고 그 해가, 내가 힙스터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던 시기. 힙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기. 


고하고, 

그땐 앨범 제목 한번 랜덤하네. 임의 접근 메모리는 뭐야? 뭘 랜덤하게 접근한단 거지? 했었는데

어제 보니까 RAM 이더라. 컴퓨터 메모리 RAM. 

문과생으로만 살 땐 모르다, IT 인이 된 지 9개월차, 이제는 주변의 사물들이 다르게 보이거나, 있는 줄도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한다.


회사 들어오고 정신이 없어지면서 블로그도 안 해서 지금 보니 마지막 글이 2월인데,

놀랍게도 회사 만족도는 여전히 90%다. 배워보고 싶은 분야의 일이라서, 기계의 언어도 결국은 외국어인지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재미나서, 회사에 훌륭한 동료가 너무 많아서, 회사가 아낌없이 지원해줘서, 나는 이정도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줘서, 너무 좋다.

재택근무도 7개월차니, 뭐, 적응하고도 남았지.



두번째 기계식 키보드를 사고, 다펑의 RAM을 다시 보게 되기까지 벌어난 일들 중 사실 가장 turning point가 되는 건 독립.

드디어 집에서 벗어났다. 가족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내 공간을 갖게 되었다. 한정된 공간에 맞춰 물건을 테트리스처럼 욱여넣는 방이 아니라, 공간에 목적을 두고 그에 맞춰 가구를 배치하고 꾸미고 색을 입힐 수 있는 내 공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clean slate. 아직 집이랑 데면데면한 것도 있고, 아래층엔 층간소음을 호소하는 남성 싸이코가 사는 탓에 이제 여기가 우리집! 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지만, 그래도 너무 붕 뜬 느낌은 아니다.

초반엔 아빠 마이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엄마 치마를 두르고 나다니는 기분 정도라고 하면 아무도 못알아듣겠지. 젠장.


내 집, 내가 세대주인 곳이 생겨 좋은 점은 친구들을 불러 맛난 걸 해먹일 수 있다는 것. 매일 볕도 들지 않고 창도 없는 어두운 부엌 겸 거실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남으면 다 버려야 했던 메뉴들을 이젠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과 눈이 부실만큼 해가 잘 드는 거실 겸 침실(?)에서 나눌 수 있다. 

어젠 커튼 달아준 친구랑은 노을 질 때즈음부턴 불도 다 끄고, 베란다 방충망까지 다 열어제끼곤 멍하니 하늘 구경을 했다. 이사온 지 열 하루 만에 처음 조용히 앉아 베란다를 내다본 날이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혼자 와인 한 병을 싹 비웠더라고. 


이런 게 하고 싶어서 독립한 건 아니지만 독립하면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게 너무 좋다.


한 가지 좀 걱정되는 건 자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어진다는 거.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라고 다들 그러지만 나는 콩알만한 방에서20년 가까이 살던 사람이라 집 하나를 혼자 통째로 쓰자니 밤엔 작은 방에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고, 거실 겸 침실은 너무 허전하고, 아래층 싸이코만 층간소음이 있다는데 막상 우리집은 옆집 윗집 너나 할 거 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밤이면 그 적막함이 공포로 몰아친다. 잦다. 낮에 같이 있는 것도 너무나 좋지만 밤에 같이 있을 사람이 더욱 간절해지는 2020년 9월.



저는 잘 지내요.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오지 않으시겠다 하실 것 같아 지레 체념합니다. 여전히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스트레스 받고 계실 것 같아 건강하지 않으시겠죠. 여전히 같이 사시나요. 하긴, 제가 궁금해할 문제는 아니네요. 그래도 제가 잘 있나 진심으로 궁금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집에도 한 번 오실래요? 우리 한 번도 한 적 없는 거 한 번 해요. 환한 곳에 마주 앉아 밥 한 끼만. 그것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