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9.

우는 밤




1.
캘리에 사는 동안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몇번 안 되는데 그 중 한 번이 라구나 비치에서 산책하던 오후였다. 당시 내 세상은 끝없는 심해 바닥같았는데 강아지와 함께 내 곁을 지나쳐간 사람들이나 황색 설탕만큼 고운 모래사장 위에서 비치 발리볼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 없이 일상적이어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또 동시에 저 정도 삶이면 행복하겠다는 희망이나 목표 같은 것도 심어주었다. 
캘리포니아의, 남가주의 해안가는 동부나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여유로우면서도 경쾌하며 가볍고, 지는 노을처럼 짧은 시간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실제로 노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바닷가 같다. 헐리우드 영화 속 장면들이 그곳에선 그저 평범한 일상의 단면이어서 가끔 자기 전에 누워 라구나 비치에서 팔던 카라멜 애플이나 베니스 비치의 $2짜리 레몬에이드와 페퍼로니 피자 세트를 더듬어본다. 그리고 울다 잔다. 

2014.11


2.
여름에 뉴욕에 가겠다고 공포했다. 나에겐 선언과 같은 결심이다.
왜 하필이면 뉴욕이냐고, 뉴욕이 뭐 대수냐는 듯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버텨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왜 이 수치스러운 과거를 도로 꺼내어 다시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를 찾으러 간다. 한국에서 태어난 내 자아가 뉴욕에 있을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내가 돌아온 그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러 간다. 뉴욕, 별 거 없네, 그러려고 간다.



3.
SBS에서 단원고 졸업생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말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랴. 대통령 얘기라도 적으면 잡혀가겠지 ^^




2016. 2. 25.

from Insta 2




1. 
어려서부터 황학동에 다녔다. 토요일 오후에 삼촌이 쌀배달 자전거의 지지대를 걷어내고 "갈래?"라고 물으면 그건 황학동에 가자는 말이었다. 콧바람 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언제나 오케이. 유치원생에겐 하나 필요없는 물건 천지였지만 자전거 짐칸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청계천 고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좌판을 구경했다. 사가면 할머니에게 혼날 게 뻔한 골동품과 장난감을 뒤적이는 삼촌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역사를 가진 것' 혹은 '과거가 있는 사람'의 마성에 눈을 뜬 것 같다.



2.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되고 도시의 미풍을 해친다는 이유로 서울은 황학동 풍물시장을 요상한 건물 안에 쑤셔박았다. 물론 청계천은 너무나 좋지만 옛 풍물시장 자리에 올라선 주상복합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뉴타운 개발로 사라져 버린 집 앞 시장 골목, 그 골목 끝 소꿉친구네 집터를 보고 있노라면, 댐 밑으로 수장된 고향을 바라보는 실향민의 심정이 된다. 나의 역사는 무채색 아파트 단지들 아래로 매몰당했다.



3. 
황학동이 전부 사라지기 직전에 지금의 내 카메라를 만났다. 당시에 삼만 원이었던가. 지금은 십만 원까지 올랐더라. 그리고 펜탁스를 살 당시 만원에 껴주시겠다던 야시카도 십만 원 가까이 올랐다.



4. 
확실히 요즘은 카메라 파는 곳도 줄었고, 매물도 줄었다. 카메라 브랜드들도 가물가물 하고 렌즈 종류며 바디 고르는 노하우도 다 까먹었다. 다 포기하고 돌다, 눈을 사로잡는 아이를 만났다.



5. 
- 사장님, 얘 한 번만 더 보고 갈게요.
- ㅎㅎㅎ 그러세요.
- 이거 진짜 깨끗하게 수리 돼요?
- 내일 카메라 맡기는 친구가 오거든요? 그 친구가 어떤 친구냐면 일본에서 이 카메라를 직접 기공해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네들이 하다 기계적으로 막히면 그걸 고스란히 싸들고 서울로 와요. 그 친구 만나러. 그런 친구예요. 허허
- 그럼 저 다음주에 다시 와도 될까요??
- 그럼, 예약금만 걸어두고 가요. 조기 옆에 커피가 500원이거든요? 그 커피로 예약금 걸어두고 가요. 그럼 누가 와서 만 원, 이만 원 더 준다고 해도 안 팔게요.
- 진짜요? 진짜죠? 커피 한 잔으로 괜찮으시겠어요??
- 허허. 나는 돈이 필요해서 나와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커피 한 잔이면 돼요. 설탕은 빼구요. 내가 살을 빼야 해서요. ㅎㅎㅎ




6. 
사장님은 돗자리 위에 개연성 없는 카메라 두 대, 조각도, 컵 세트를 펼쳐놓고 일본어로 된 미술 서적을 읽고 계셨다. 커피를 받아드시곤 예쁜 아가씨에게 이런 걸 시켜서 미안하네요 ㅎㅎ 하시더니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오라셨다. 그리고 프랑스어 더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
오늘 다른 카메라 매장에선 사장님이 "그래, 사진을 찍겠다 하면 저 정도 카메란 들고 다녀야지" 하면서 '판타롱' 입은 멋쟁이라고 칭찬해주셨다. 난 한 1960년에 태어났어야 했나봐.

2016.02.20




1. 
어제 새벽에 급작스러운 연락 두 통이 있었다. 하나는 탱사마의 문자, 그리고 그 문자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던 전화.



2. 
"아, 지금 듣는 거 바흐 평균율이라는 곡이야. 음악의 구약성서라고도 불리는데, 피아노에 12음계가 있잖아? 음계들을 반음정으로 나누어서 평균을 맞춘 음으로 작곡한 곡인데,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
"수학적인 곡이네요?"
"응, 맞아.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면도 있고."
"구조적인?"
"응, 근데 정말 아름다워. 슈만도 좋은데, 바흐도 예쁜 곡이 많거든. 아, 내가 요새 계속 듣는 게 있는데..."




3. 
꿈결에 나눈 대화는 그렇게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균율을 찾아보았다. 드디어 클래식 입문인가. 근데 평균율 말고 고 뒤에 알려준 앨범이 너무 좋다. 나만 알고 있어야지. 쿠쿠



4. 
음악의 구약성서라니. 너무 멋진 표현이잖아.


2016.01.??




필리버스터





오늘은 글을 안 쓸 수가 없는 날이구나.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화딱지가 나지만
정치가 펄떡거리는 게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리고 필리버스터 생방으로 좀 보세요. 그녀와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땡깡을 부리는지-_-



1. 
인사영입때부터 지금 필리버스터까지 이번처럼 정치가 재밌다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혼용무도인 덕분에 진짜 정치드라마를 보고 있다.



2. 
미국 정치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대선 캠페인엔 늘 야망으로 눈을 반짝이는, 재기 넘치는 젊은 당원들이 가득했다. 생동감이 넘쳤다. 실제론 겁나 폐인같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좀 뒤에 알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역량은 영화 이상이었다. 처음엔 충격이었고 그 다음엔 부러웠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졸라' 멋있는거구나, 하면서. 그런 정치가 국가의 태동이 된 곳.



3. 
학부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했다기에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맛을 진작 알았음 수업이라도 하나 들어볼 것을.



4. 
민지 파이팅




2016. 2. 13.

석조전




서울 시내에 있는 고궁 중에서 나는 덕수궁을 가장 좋아한다.
요즘은 궁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더는 특별할 것도 없는 취향이지만, 그래도 꼭 하나 꼽으라면 나는 언제나 덕수궁.
귀국하자마자 처음 다니기 시작했는데, 석조전은 올해 처음 가봤다.
내가 이 좋은데를 왜 몰랐지!!! 했는데, 내가 오고 그 다음해에 내부 공사를 시작해 작년에 재개장했다더라.

결국 작년 10월엔가 갔던 것 같다.

내가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 각 방마다, 넓은 홀마다 고여있던 그 곳의 공기와 애잔함을 단 한 뼘의 어긋남도 없이 묘사해보고 싶은데, 나는 멀었다.

사진으로 대신.


All photographed in Kodak Gold ISO 200 with Pentax K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