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5.
from Insta 2
1.
어려서부터 황학동에 다녔다. 토요일 오후에 삼촌이 쌀배달 자전거의 지지대를 걷어내고 "갈래?"라고 물으면 그건 황학동에 가자는 말이었다. 콧바람 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언제나 오케이. 유치원생에겐 하나 필요없는 물건 천지였지만 자전거 짐칸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청계천 고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좌판을 구경했다. 사가면 할머니에게 혼날 게 뻔한 골동품과 장난감을 뒤적이는 삼촌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역사를 가진 것' 혹은 '과거가 있는 사람'의 마성에 눈을 뜬 것 같다.
2.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되고 도시의 미풍을 해친다는 이유로 서울은 황학동 풍물시장을 요상한 건물 안에 쑤셔박았다. 물론 청계천은 너무나 좋지만 옛 풍물시장 자리에 올라선 주상복합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뉴타운 개발로 사라져 버린 집 앞 시장 골목, 그 골목 끝 소꿉친구네 집터를 보고 있노라면, 댐 밑으로 수장된 고향을 바라보는 실향민의 심정이 된다. 나의 역사는 무채색 아파트 단지들 아래로 매몰당했다.
3.
황학동이 전부 사라지기 직전에 지금의 내 카메라를 만났다. 당시에 삼만 원이었던가. 지금은 십만 원까지 올랐더라. 그리고 펜탁스를 살 당시 만원에 껴주시겠다던 야시카도 십만 원 가까이 올랐다.
4.
확실히 요즘은 카메라 파는 곳도 줄었고, 매물도 줄었다. 카메라 브랜드들도 가물가물 하고 렌즈 종류며 바디 고르는 노하우도 다 까먹었다. 다 포기하고 돌다, 눈을 사로잡는 아이를 만났다.
5.
- 사장님, 얘 한 번만 더 보고 갈게요.
- ㅎㅎㅎ 그러세요.
- 이거 진짜 깨끗하게 수리 돼요?
- 내일 카메라 맡기는 친구가 오거든요? 그 친구가 어떤 친구냐면 일본에서 이 카메라를 직접 기공해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네들이 하다 기계적으로 막히면 그걸 고스란히 싸들고 서울로 와요. 그 친구 만나러. 그런 친구예요. 허허
- 그럼 저 다음주에 다시 와도 될까요??
- 그럼, 예약금만 걸어두고 가요. 조기 옆에 커피가 500원이거든요? 그 커피로 예약금 걸어두고 가요. 그럼 누가 와서 만 원, 이만 원 더 준다고 해도 안 팔게요.
- 진짜요? 진짜죠? 커피 한 잔으로 괜찮으시겠어요??
- 허허. 나는 돈이 필요해서 나와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커피 한 잔이면 돼요. 설탕은 빼구요. 내가 살을 빼야 해서요. ㅎㅎㅎ
6.
사장님은 돗자리 위에 개연성 없는 카메라 두 대, 조각도, 컵 세트를 펼쳐놓고 일본어로 된 미술 서적을 읽고 계셨다. 커피를 받아드시곤 예쁜 아가씨에게 이런 걸 시켜서 미안하네요 ㅎㅎ 하시더니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오라셨다. 그리고 프랑스어 더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
오늘 다른 카메라 매장에선 사장님이 "그래, 사진을 찍겠다 하면 저 정도 카메란 들고 다녀야지" 하면서 '판타롱' 입은 멋쟁이라고 칭찬해주셨다. 난 한 1960년에 태어났어야 했나봐.
2016.02.20
1.
어제 새벽에 급작스러운 연락 두 통이 있었다. 하나는 탱사마의 문자, 그리고 그 문자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던 전화.
2.
"아, 지금 듣는 거 바흐 평균율이라는 곡이야. 음악의 구약성서라고도 불리는데, 피아노에 12음계가 있잖아? 음계들을 반음정으로 나누어서 평균을 맞춘 음으로 작곡한 곡인데,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
"수학적인 곡이네요?"
"응, 맞아.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면도 있고."
"구조적인?"
"응, 근데 정말 아름다워. 슈만도 좋은데, 바흐도 예쁜 곡이 많거든. 아, 내가 요새 계속 듣는 게 있는데..."
3.
꿈결에 나눈 대화는 그렇게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균율을 찾아보았다. 드디어 클래식 입문인가. 근데 평균율 말고 고 뒤에 알려준 앨범이 너무 좋다. 나만 알고 있어야지. 쿠쿠
4.
음악의 구약성서라니. 너무 멋진 표현이잖아.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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