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9.

PoF

 




1.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2.

그가 나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아니 에르노다. 그는 아니 에르노를 내 세계에 소개해주었고, 아니 에르노의 글은 내가 당신을 기록할 용기를 주었다. 


요즘 하도 소설을 안 읽은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이 무엇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교보에 들러 소설 섹션을 기웃거리는데,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생각났다. P와의 섹스, 임신, 낙태 그런 걸 적은 책 소개문구를 읽고 있자니 '이 P가 혹시 필립 걘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P였음), 아니 에르노 신작이 이전에 만났던 연인에 대한 글이라는 것이 떠올라 책은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네이버를 켠 다음 "아니 에르노 신간"이라고 검색하니 역시나 30세 연하였던 연인 어쩌구에 대한 어쩌구 저쩌구라는 소개글이 떴다 (이건 내가 생각한 P가 맞음). 


그가 처음 <<단순한 열정>>을 소개해주었을 때 "<<포옹>>을 꼭 같이 읽어요.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라, 둘을 다 읽고 나서 알려주세요." 라고 일러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아니 에르노의 이번 신간이 영영 궁금하지 않았을 뻔 했다. <<포옹>>은 아니 에르노의 연인이었던 필립 빌랭이 두 사람 사이의 만남과 사랑, 관계, 이별에 대해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를 차용해 쓴 에세이(?)로, 30살이나 많은 아니 에르노는 어떻게 이 칭얼거림을 다 받아주고 앉았나, 그쪽은 할 말이 없나, 어이구 답답해, 아니 에르노도 좀 이상하네,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어느 소개글이나 홍보문구에서도 필립 빌랭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가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루앙이라든가 30살 연하의 연인과의 만남과 이별이라고 하니, 이번에 나온 신간 <<젊은 남자>>가 바로 그 "그쪽" 이야기가 아닐는지. 


오늘 샀으니 일단 탈고하고 확인해야지!



 

3.

아직 글이 되기에는 녹아내리는 생크림 케이크마냥 위태롭고 연약하다. 혹은 맛이 들지 않은 생열무처럼 풋내나고 민둥민둥하다든가.




4.

나는 그날 그 꽃이 사고 싶었다.

김기림이 남긴 울금향과 이여성에 관한 수필을 며칠 전에 다시 읽은 터라 조만간 튤립을 사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인적 없는 골목의 작은 술집에 난데없이 등장한 인물로 울금향에 대한 욕구가 다시 솟아났다. 낱개로 비닐포장한 튤립이며 장미를 한 아름 들고 들어오신 어머님은 단조로운 술집 풍경에 비해 너무도 화사하고 천진난만해 그 장면이 마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연극배우처럼 보였다. 매장 안에 있던 우리나 사장님네 테이블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맞은 편에 있던 나를 향해 웃으시며 "내일이 화이트 데이인데, 내일은 사람이 조금 더 많겠죠?"라는 질문을 남기고 가게를 떠나셨다.

'아, 얼만지 물어볼 걸... 한 두어 송이만 살걸...' 

그 말이 왜 입에서 안 나왔는지, 취해서 운동 기능이 떨어졌나, 사달라고 해볼 걸 그랬나, 꽃을 사달라는 여자를 허황되다고 생각할까, 어머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저 꽃은 오늘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은 도쿠리잔을 비웠다.




2023. 3. 15.

열아홉의 캐서린에게,

 



0.

얼마전 생일을 맞아 아주 짧게 스무 살의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오늘 올빼미 시절 파일을 뒤져보니 그때는 열아홉의 나에게 편지를 써놨더라. 내용은 비슷한데, 그땐 정신과 가기 전이라 그런가 애가 그, 뭐라고 해야하나, 자기연민을 되게 극적으로 썼더라고 ㅋㅋㅋㅋ

여러분(아마도 현아와 사과집)에게 잦은 업데이트를 약속한 대로, 오늘은 그 편지를 올려본다.


---


2019-03-03

열아홉 살 캐서린에게,


1.

한 번에 붙을 줄 알았던 대학원에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이 그랬다.


여건이 안 된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대로 주저 앉은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가끔 섣불러도 괜찮은 것 같아요. 응원해요, 나연씨.


섣부르라고 해줬던 사람이 곁에 있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었다.


2.

캐서린아, 안녕?

네가 네 이름을 싫어하니 나연이라고는 부르지 않을게. 그래도 캐서린은 네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니까 괜찮지?

뭔가 내가 과거의 나를 캐서린이라고 부르려니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자의식 과잉 사람 같아 몹시 어색하고 거북하구나. 그래도 뭐라고 부르긴 불러야 하니까 그럼 서린이라고 부를게. 


지금은 2019년이야. 나는 네가 좋아하는 광화문 스타벅스에 와 있어. 신기하지? 출국 전, 그 입술두꺼운 자식이랑 마지막으로 만났던 스타벅스는 건재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 

나는 곧 만 서른하나가 되니까 그때로부터 열 해하고도 둘이 지났구나. 지금 방금 말투 되게 늙은이 같지 않았니? 너는 생각보다 빠르게 낡고 있어. 어차피 유학을 시작한 시점부터는 나이에 대해서 신경 끄기로 했으니까 늙은이가 되어간다는 게 크게 놀라운 소식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빨리 낡은 사람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단다. 어찌나 꼰대력이 강해지는지, 하루하루가 놀라워. 


우선 열아홉에 시작된 편두통이 평생 너를 괴롭힐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소식을 전할게. 네가 원래도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잖아? 그래도 마귀할멈이랑 살 때는 애드빌 두 알 먹고 반나절만 앓아 누우면 사그라들던 통증이 이젠 한 번 시작되면 졸도해서 응급실에 실려 가야 끝이 날 정도로 심해졌단다. 재활의학과 선생님은 이게 다 거북목과 틀어진 어깨, 척추 위치와 상관없이 자기 주장하기 바쁜 골반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니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코어와 기립근 세우는 일까지 신경을 쓰냐는 말이지? 

몸과 관련한 희소식이라면 이제 다시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있겠구나. 왜, Moorpark 살 때, 알바 갈 때마다 뙤약볕에 한 시간씩 걸어야 했던 걸 줄여보겠다고 자전거를 한 대 샀잖아? 분명 집에서 가게까지는 내리막 길의 연속인데도 자전거로 50분씩이나 걸려서 도대체 이걸 왜 타고 오는 거지, 스스로 너무 웃겼잖아. 브레이크에서 손을 떼지 않고는 도무지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단 10분이라도 마귀할멈과 떨어져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신났는데 말이야. 애써 절약한 10분으로 할 수 있는 일라고는 옆 블록 쇼핑몰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출근하는 거였지만. 기어는커녕 자전거 무게도 상당해서 업힐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지. 성가시기만 한 분홍색 자전거를 끌고 낑낑대며 언덕을 오르던 퇴근길은 또 얼마나 외로웠어.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희푸른 보름달을 보며 오늘도 하루가 겨우 끝났다고 한숨을 내쉬었지. 요즘도 달을 보면 가끔 코끝이 매워져. 아까도 이른 저녁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 보다 갑자기 눈 앞이 흐려져서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High Street에서 넘어졌던 날 기억하지?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날이었잖아.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풍경이었어. 그날도 열사병에 걸려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지. High Street은 깡시골인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도로였는데, 어느 방향에서도 차가 오지 않았고, AmTrak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잖아. 그런데 굳이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겠다고 핸들을 꺾다 실패해서 연석에 부딪혔지. 핸들 조작도 서툴렀으면서 왜 급커브를 틀었을까? 그때 몸이 아주 잠시 붕 떠올랐던 것도 같은데, 그 다음 장면에서 너는 얼굴로 랜딩한 채 대로에 엎어져 있었지. 행인 하나 없는 거리였는데도 뭐가 그렇게 창피했는지, 쪽팔린 게 더 커서 아픈지도 모르겠더라. 그래도, 왜,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아저씨가 Honey, are you okay? 하고 물어봐줬잖아. 아프건 둘째치고 마귀할멈 아들내미라는 새끼는 에어컨 돌아가는 제 방에 늘어져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는데, 왜 사돈의 팔촌의 당숙 뻘인 내가, 이 땡볕에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끌고 나와서, 최저 시급도 챙겨주지 않는 마귀할멈 요거트 가게에 나가겠다고, 이 수모와 치욕을 겪고 있어야 하나. 그게 너무 분해서 금방이라도 대성통곡하고 싶었지. 그래도 친절한 아저씨가 무슨 죄람, 하며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I’m fine. Thank you. Really. I’m okay. 대답하고 일어나 앉아 크게 웃었잖아. 

그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탓인지 지금 셀카를 찍어보면 턱이 한 쪽으로 틀어져있어. 오른쪽 팔꿈치 상처도 흉터가 남았단다. 그때 그 시멘트 바닥에 내다 꽂혔을 때 얼굴로 전해졌던 충격과 울림, 통증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그보다 더 큰 상처는 아직 오지 않았단다. 곧이야. 곧 올거야. 곧 올거고.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틀어진 턱관절보다 더 크게, 더 고통스럽게, 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인생이 틀어질지도 몰라.


미리 사과할게. 너무 너무 미안해. 

너는 곧 네가 유학 내내 불법체류자 신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마귀할멈이 영주권을 내어주겠다며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받아가고, 변호사 선임비용을 받아가고, 법원 서류 처리 비용으로 돈을 받아가던 게 결국 너를 볼모로 삼은 3년짜리 사기였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최후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한국 집에 유서를 남겨놓은 채 종적을 감출 거고, 너는 곧 동생과 단 둘이 마귀할멈의 집에 남겨지게 될 거야. 

엄마는 얼마 뒤 미국으로 야반도주를 와. Family reunion. 이런 이산가족 상봉을 고대하며 버틴 게아닌데, 싶어 그나마 남아 있던 생에 대한 의지를, 가족애를 잃겠지. 그리고 결국 엄마도, 동생도, 지옥 같았던 미국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모두 네가 이기적인 냉혈한이라고 욕할거고. 하지만 엄마 말을 따라 한인 교회에서 시민권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네 삶은 아니야. 굶어 죽더라도 공부하겠다며 돌아온 너를, 기어이 대학원에 가는 너를, 가족들은 다 못마땅해할 거야.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미용 기술을 배우든 동대문에 나가 옷을 팔든 하면 되지 않느냐는 엄마 말에 그럴 거면 그렇게 힘들게 영어는 뭐하러 가르쳤냐고 대꾸할 수 있는 배짱 두둑한 배은망덕한 년으로 다시 태어나. 그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요즘도 이 모든 게 미리 막을 수 있던 일은 아니었을까 종종 시뮬레이션을 돌려봐.

일면식도 없는 친척이 내게 영주권을 내어주겠다고 할 때, 조금이라도 의심했어야 했는데. 셈이 밝지 못한 엄마 대신 내가 직접 나서서 영주권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서류인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우리 학교는 공립학교라 등록금을 내지 않는다고 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바로 카운슬러를 찾아가야 했는데. 밖에서는 운 좋아 얻은 수양딸이라고 나를 자랑하다가 집에서는 하녀처럼, 몸종처럼 부리던 마귀할멈이 졸업 일주일 전, 급하게 영주권 신청 서류를 내밀며 학교에다 이름 변경 신청서를 접수했을 때, 네 성은 이제 김 씨가 아니라 오 씨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을 때, 그때 막았어야 했는데. 

나도,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그 누구 하나도 널 구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 하지마.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지만, 마귀할멈의 사기행각이 발각되는 덕분에 학대는 끝이 나니까, 그걸 위안을 삼아보면 어떨까?

아니면, 네가 11년 후엔 때때로 작가 소리를 듣는 통번역대학원생이 된다는 걸 미리 일러주면 조금 힘이 되겠니? 환불하러 간 옷가게에서 독자인 점원을 만나기도 하고, 카페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이 다가와 학교 후배라며 싸인을 요청하는 날도 생겨. 또 하루는 작업한답시고 카페에서 멍만 때리다가 지성, 갬성 넘치는 척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는데 3분 뒤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분이 네 앞으로 핸드폰을 살포시 내밀며 “혹시 작가님이세요?” 라고 묻는 일도 벌어진단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너는 네 몸이 쥐구멍에 비해 너무나 크다는 생각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지만, 이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친구에게 전하며 눈물이 찔끔 날 때까지 웃기도 해. 

그런 날은 와. 쉽지 않은 시간이고 그 뒤로도 여러 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네 발목을 낚아채 널 주저 앉히려 하지만, 그런 날은 와.


곧 졸업식이겠다. 발레딕토리안으로 단상에 서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했던 졸업 후, 친구들이 모두 대학에 간다며 들 떠 있을 때, 너는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달아. 구덩이를 덮어 둔 풀더미를 조심스레 밟고 서 있었을 뿐, 결국 네 인생은 천길 낭떠러지 구덩이었다는 걸 깨달아. 방금까지 발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얽혀 있던 풀더미가 눈 깜짝할 새 풀어헤쳐지고, 구덩이가 드러나지. 그리고 깨어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일 거야.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너무나 요원한 동굴의 끝.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고 하잖아? 시간은 상대적이라니까, 우리에게 1광년은 지구에서 8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1광년만 나아가면 너도 빛에 도달해 (슬프게도 우린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운명을 타고 났단다. 와식 생활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일어나 움직여야만 해). 온몸이 군고구마 색으로 탈 만큼 작렬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다시 볕을 쬘 수 있어. 동굴의 끝에 다다르는 날은 와. 

하지만 이제 동굴 입구에 선 너에게 그런 요원한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미래는 횃불이 되어주지 못하겠지. 그러니 사과할게. 나는 그 자전거 사고 이전에도, 그 후로도, 단 한 순간도 너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른 유학이 절망으로 쏟아지는 내리막길인 줄 알았더라면, 최소한 자전거 핸들이라도 똑바로 쥘 줄 아는 인간이었어야 했는데.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인간이 돼있어. 미안해. 많이 미안해.

우리가 살며 겪는 모든 경험은 정신뿐 아니라 신체에도 흔적을 남긴다고 하잖아. 내가 둔했던 탓에 네 열아홉, 스물은 턱에, 팔꿈치에 상흔을 남기겠지. 네가 아닌 어느 누구도 그 상처는 보듬어주지 못할 거야. 이해해주지도 못해. 심지어 엄마조차. 하지만 “생의 근원적 외로움은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담담하게 적는 날도 와. 그걸 깨달아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씁쓸하게 웃는 날도 오더라고.

죽거나 죽이지 않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네 마음 백 번 이해해. 네 인생을 망쳐놓은 게 왜 하필이면 네 가족일까, 왜 하필이면 가족이어서 맘껏 욕을 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걸까, 괴로운 거 알아. 네가 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은 널 대견해 하다가도 기구한 생을 산 사람이라고 외부인 취급할거야. 때로는 네 상처에 소금을 비벼대는 사람도 생길 거야. 그게 네가 친구라 부르던 사람일 때도 있어. 이번 생은 기댈 언덕 하나 없는 회차라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닫게 한 것도 너무 미안해. 


그래도 가족보다 더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 아주 드물지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만나. 그 사람들 곁에 있으면 너도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가끔은 꿈을 품기도 하고, 꿈과 현실의 괴리를 견딜 수 없어 부단히 꿈을 향해 나아가 무언가 이루기도 해. 

다만 이 모든 건 네가 생을 포기하지 않아야 생기는 일이야.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 나를 포기하지 말아줘.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가끔은 섣불러도 괜찮아.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날도 오니, 코끝이 매워질 때마다 주문처럼 외렴.


내일은 대학원 3학기 개강일이야. 아, 지금 넌 영어로 먹고사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있겠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지. 몇 년 안에 단어를 만지는 일이 너의 천직이라는 걸 운명처럼 깨닫는 밤이 올 거야. 그때 느낀 희열과 벅차오름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걸 생각하니, 다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아직까지 로또에 당첨되는 일도, 영화처럼 사랑에 빠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 영화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몇 번 생기긴 해 – 네 글이 위로가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생길 거야. 너무 근사한 일 아니니?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열아홉의 너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2019년에도 인간은 광속을 거스를 수가 없네. 이 편지가 너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이해해줘. 

나는 너를 많이 아껴. 여전히 온전하게 인정하지도 못하고, 믿어주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격하게 아낀다. 

어서 시계바늘을 달려 오렴. 기다리고 있을게.





2023. 3. 13.




1.

오늘 정말이지 새 단행본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지 2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원고가 3개월 묵은 음쓰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니까 읽을 만 하다는 느낌이 처음 들었다는 거다.

오늘 새 노트북 개봉해서 그런가(맥북 온 지 일주일 다 되도록 포장도 안 뜯음) 일이 너무 잘 되는거지. 집중 빡 해서. 아 이 흐름을 타야한다!!! 해가지구 집 와서도 원고 호다닥 써서 4/5정도 편집자님께 보냈다.


지난 번 메일 때는 원고 늦은 게 죄송해서 해풍에 바싹 마른 겨울 황태같은 마음이라 했는데 오늘은 낙지탕탕이엇음.

약간 해산물 테마인가봄. 눈물이 바다를 이뤄서 그런가 ㅠㅠㅠㅠ



2.

내가 너를 궁금해해도 되는 걸까.




2-2.

서른 다섯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거다 구체적인 상을 그려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타인이 보이는 관심이 단순한 친절인지 의도가 있는 접근인지 구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못하네.




3.

안물안궁이겠지만 첫 책을 만들 때 나 혼자 (당연함) 구상한 에세이 트릴로지가 있다.

섹스-돈-몸을 소재로한 에세이 3부작. 섹스는 사실 하려던 거 1/10도 못한 거지만 일단 제목이라도 그리 나갔으니 한 셈 치고, 이번 원고는 돈. 다음은 몸과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까지 하고 나면 사실 나 책 더 안 쓸 거 같아. 너무 고역이야… 그냥 트위터나 할래요…




4.

어제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을 치우는데, 마치 군무처럼, 손이 향하는 방향과 집기 집는 순서, 그릇을 포개는 방법 따위가 합을 오래 맞춘 듀오처럼 흘러서, 그게 몹시 재미있었다. 혼자 살폿 웃음이 났는데, 헤결 봤느냐고, 방금 시마스시 씬 같았다고 말해보려다 그냥 혼자 은밀하게 즐겼다. 


나 쫌 의뭉스러워진 거 같아. 헤헷? 근데 좀만 더 닥칠 줄 알면 더어 좋겠다, 나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