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2.
그가 나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아니 에르노다. 그는 아니 에르노를 내 세계에 소개해주었고, 아니 에르노의 글은 내가 당신을 기록할 용기를 주었다.
요즘 하도 소설을 안 읽은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이 무엇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교보에 들러 소설 섹션을 기웃거리는데,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생각났다. P와의 섹스, 임신, 낙태 그런 걸 적은 책 소개문구를 읽고 있자니 '이 P가 혹시 필립 걘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P였음), 아니 에르노 신작이 이전에 만났던 연인에 대한 글이라는 것이 떠올라 책은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네이버를 켠 다음 "아니 에르노 신간"이라고 검색하니 역시나 30세 연하였던 연인 어쩌구에 대한 어쩌구 저쩌구라는 소개글이 떴다 (이건 내가 생각한 P가 맞음).
그가 처음 <<단순한 열정>>을 소개해주었을 때 "<<포옹>>을 꼭 같이 읽어요.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라, 둘을 다 읽고 나서 알려주세요." 라고 일러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아니 에르노의 이번 신간이 영영 궁금하지 않았을 뻔 했다. <<포옹>>은 아니 에르노의 연인이었던 필립 빌랭이 두 사람 사이의 만남과 사랑, 관계, 이별에 대해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를 차용해 쓴 에세이(?)로, 30살이나 많은 아니 에르노는 어떻게 이 칭얼거림을 다 받아주고 앉았나, 그쪽은 할 말이 없나, 어이구 답답해, 아니 에르노도 좀 이상하네,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어느 소개글이나 홍보문구에서도 필립 빌랭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가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루앙이라든가 30살 연하의 연인과의 만남과 이별이라고 하니, 이번에 나온 신간 <<젊은 남자>>가 바로 그 "그쪽" 이야기가 아닐는지.
오늘 샀으니 일단 탈고하고 확인해야지!
3.
아직 글이 되기에는 녹아내리는 생크림 케이크마냥 위태롭고 연약하다. 혹은 맛이 들지 않은 생열무처럼 풋내나고 민둥민둥하다든가.
4.
나는 그날 그 꽃이 사고 싶었다.
김기림이 남긴 울금향과 이여성에 관한 수필을 며칠 전에 다시 읽은 터라 조만간 튤립을 사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인적 없는 골목의 작은 술집에 난데없이 등장한 인물로 울금향에 대한 욕구가 다시 솟아났다. 낱개로 비닐포장한 튤립이며 장미를 한 아름 들고 들어오신 어머님은 단조로운 술집 풍경에 비해 너무도 화사하고 천진난만해 그 장면이 마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연극배우처럼 보였다. 매장 안에 있던 우리나 사장님네 테이블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맞은 편에 있던 나를 향해 웃으시며 "내일이 화이트 데이인데, 내일은 사람이 조금 더 많겠죠?"라는 질문을 남기고 가게를 떠나셨다.
'아, 얼만지 물어볼 걸... 한 두어 송이만 살걸...'
그 말이 왜 입에서 안 나왔는지, 취해서 운동 기능이 떨어졌나, 사달라고 해볼 걸 그랬나, 꽃을 사달라는 여자를 허황되다고 생각할까, 어머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저 꽃은 오늘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은 도쿠리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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