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9.

물론 약을 먹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 3




변화가 없는 2주.
대신 수면의 질이 급락했다.
약으로 수면시간 패턴을 잘 잡아서 11시면 졸리기 시작해서 보통 1시 전엔 잠드는데,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깬다.

2~3시 사이에 한 번,
5시에 한 번,
7시 좀 넘어서 한 번.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요즘 정말 신생아처럼 아무 근심 걱정도 없는데.

잠을 설쳐서인지 뭔지 목덜미부터 어깨, 날개뼈, 등허리까지 근육 긴장이 풀리질 않아서 결국 안마원까지 다녀왔다 (이 얘긴 또 따로 써야지).

병원 갔더니 일단 수면제를 다시 먹어보자 하셔서 다시 먹는 중.
먹으니 역시 깨진 않는다. 어깨도 덜 아프고. 
어깨가 나아진 건 안마원 덕분인지 약 때문인지 잘 파악이 안 된다.

병원 다니면서 계속 이런 상태다.
약 덕분에 뭔가 변하고 있긴 한건지, 
공부에 대한 의욕이 조금이라도 돌아온 건 정말 약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학기말이 다가오고, 작가라고 불리는 일도 줄어들고, 엄마가 다시 병원에 가면서 나의 스트레스 요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아진 건지.



아, 중간에 약도 바꿨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띵하던 건 없어졌는데, 이것 역시 약을 바꿔서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스트레스탓이었는지 판단 불가.

나는 왜 애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인을 찝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세상은 연구실이 아닌데 말이야.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종속 변수같은 게 있을 수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면면이 독립 변수고 제 멋대로 날뛰고 제 멋대로 변한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 찾아온 긍정적인 변화라고하면 일단 엄마와 싸우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크다. 엄마에게 짜증내는 빈도도 줄었고, 엄마에게 품고 있던 분노? 원망? 원한?도 많이 줄었다. 근데 이것 역시 엄마가 다시 입원한 덕분에 우리가 한 공간에 살지 않아서인지, 뭔지 모르겠다.


저번에 얘기한, 이불에 돌돌 쌓인 감정이라는 게 생각해보니
감자떡에 비유하는 게 딱 맞겠다. 소가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감자떡.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있지만 울퉁불퉁한 떡 때문에 소의 형태나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감자떡.

나는 시방 고요한 감자떡이다.




2019. 5. 5.

물론 약을 먹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 1 특이사항




정신건강의학과

1.
내가 가는 병원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론 대기실 쇼파와 커피 테이블이,
왼쪽으론 바닥부터 천장까지 솟은 책꽂이와 하얀 6인용 테이블이 서 있다.
처음 간 날은 어쩔 줄 몰라 대기실 중앙에 오도카니 서서 "저... 3시 반 예약한 김나연인데요..." 라고 인사했다. 데스크에 계시는 분이 잠시 앉아계시라고 하시기에 오른쪽으로 돌아 쇼파에 앉았다. 통유리창 앞에 놓인 푹신한 쇼파에 앉았더니 바로 맞은편 벽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쇼파에 얌전히 앉아 진료시간을 기다려야지, 하다가도 금세 두 눈으로 서가의 책등을 훑고 있는다. 결국 쇼파에 가방과 외투만 벗어두고 곧장 맞은편 벽으로 걸어간다.

2.
매번 예약 시간보다 5-10분 정도 일찍 가는데, 보통은 대기실엔 나 혼자다. 
한 번은 한 환자분이 서가 앞 테이블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 앞 세션 환자인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친다거나 얼굴을 보는 것 혹은 보여드리는 것이 실례인 것 같아 그날은 서가 근처에 가지 않고 조용히 쇼파에 앉아만 있었다.

3.
첫 날은 입을 뗀 지 5분만에 울었다. 진료 도중 운 건 아직까지 그 날이 유일하다.

4.
선생님은 어떻게 오셨냐고 하거나 이번 주에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는 없냐는 질문을 하신다. 아마 모든 진료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질문인 것 같다. 
매번 당하는 질문인 걸 아는데도 32년 인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5.
정신과는 처방전이 없다. 데스크에 계시는 간호사님께서 직접 조제해서 약을 주신다.
치료비에는 약값과 조제비가 포함된다. 처음 상담 간 날은 그게 가장 신기했다.

6.
이 병원에 가기 전에 심리상담소를 한 곳 갔었다.
지난 생일, 정말 더는 못하겠다 싶었고, 그렇다고 자살충동이 인 건 아니라 어디든 가서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자는 절박함에 다다랐다.

심리상담소 선생님은 상담이 처음이라는 나에게 이런 저런 기본 정보를 알려주셨는데, 상담 마지막엔 아무래도 처음이니 병원이든 상담소든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을 때까지 두세 곳을 둘러보기를 권하셨다.

여긴 그래서 오게된 두번째 병원.

병원을 바꾸는 것은 미용실을 바꾸는 일 만큼 쉽지 않다.
남에게 잘 맞는다고 나에게도 잘 맞는 곳이란 보장이 없고,
한 군데 뚫어 놓으면 어쩐지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 게을러지는 것도 있고.

7.
생각보다 치료비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병원이나 상담소 나름이겠지만 내가 갔던 상담소와 병원을 비교하자면 상담소 진료 비용이 높았다. 

8.
생각보다 주변에 약을 먹는 친구들이 많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내가 먼저 묻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거나 심리적으로 위태로워지면 친구들이 먼저 병원 얘기를 꺼냈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 덕분에 약물 치료에 대해 현실적인 기대와 염려를 품게 되었다.

9.
그 외 특이사항들이 생각나거나 혹은 새로운 사실을 배우게 되면 리스트를 수정해 나갈 참이다.



물론 약을 먹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 0




안녕하세요?
제가 원래 제 블로그에 안녕하시냐느니 어쩌냐느니 이런 인사치레 잘 안 하는데 워낙 오랜만에 글을 쓰는 거라 어색해서 어색한 인사가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요.
맨날 변명만 하는 사람 같네요. 하지만 사실인걸!!!!
대학원 3학기,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사람은 과제가 정말 많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과제만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요.

통역은 점점 무섭습니다. 한영 통역이 특히 그래요.
잘 못하니 계속 지적 받고, 의기소침해지고, 스트레스 받으니 더 하기 싫어지고, 그래서 연습을 안 해서 또 지적을 받고. 악순환입니다. 의기소침 부분에서 고리를 딱 끊고 연습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영한은 곧 잘 합니다. 연습은 똑같이 안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번역은 계속 어렵습니다. 갈 길은 먼 데 에너지가 부족하네요.

글쓰기도 잠시 중단했습니다. 선천적 게으름과 더불어 학업 쓰나미가 제일 큰 이유지만 생각이 단순해졌다는 것도 원인인 것 같습니다.

사고가 단순해졌어요. 요즘 병원에 다니거든요.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문장 같지만 우리에겐 추론능력이 있으니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아시겠죠?

상담의 필요성을 느낀지는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적어도 10년은 되었어요.
10년동안 미룬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다른 포스팅으로 기록하려 합니다.

약을 먹은 지 오늘로 꼬박 한 달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약효가 나려면 보통 두세 달은 걸린다는데, 저는 매주 뭔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변화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 그리고 요즘은 뭐 하나 오래 기억하는 법이 없어서, 글로 적어 남겨두려 합니다.


태그도 걸어야겠네요.

그럼 e10000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