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23.





On the course of a literary sub-genre pilgrimage,

1. 
"책 재고 확인 좀 하려고 하는데요."
"네, 제목 말씀해주세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예요."
"......네?"
"...쏘...쏘프트웨허 객체희 생헤 주기..."
"컴퓨터 서적인가요?..."
"아... 아니요. 소설...인데..."
"......아... 제목 다시 한번만?..."



15 weeks ago



2.
아까 저녁 먹고 나서 정호오빠랑 아페쎄에 들려 샌들 한 켤레를 봤다. 아마 한 3개월은 눈독 들였던 것 같다.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래, 열심히 번 돈으로 신발 한 켤레 산다는데, 뭐' 하면서 혼자 들떠있었다. 작년에 시작한 어린이 후원 금액을 만 원 늘리는 일을 두고는 그렇게 망설여놓고 50만원짜리 샌들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김운하씨 기사를 읽었다.
어려서는 막연하게 예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재능이 아닌 환경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후원인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야망같은 건 어려서도, 한창 크고 있는 지금도 없지만 내가 구상해 놓은 일을 하려면 일단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면 큰 기업에 들어가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이상주의자의 순진한 꿈같겠지만 영화제는 나에게 이상실현의 단초가 되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언젠가 태용에게 우스개 소리로 이제 영화쪽 일은 그만 할거라고, 대신 돈 많이 벌어서 한국영화 두 번, 세 번씩 보겠다고 농담 같은 진담을 건낸 적도 있다. 물론 후원이라는 건 부유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케익 한 조각,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보다 연극 한 편, 책 한 권을 사서 보는 것이 더 즐겁거나 가치있다고 생각되면 그냥 그것부터 하면 된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이윤'이 아니라 장기적인 효용을 생각한다면 아이들 교육에 작은 보탬을 주어도 된다.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만 나누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더 큰 단위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지속해서 발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건 구조의 문제고, 사회가,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이걸 적고 있는 지금도 사실 아페쎄 샌들은 사고 싶다. 기사를 읽고 어쭙잖은 양심의 가책과 책임감, 무능력함을 느끼다가도 내일이면 또 신발 생각이 날 것 같다. 잘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근데 이 ㅆ, 나는 신발 한 켤레를 두고도 마음이 천근 만근인데 이 나라는 마른 논바닥이든 국민이든 다 죽어가는 데다 물대포로 속 후벼 파낸 것 말고 한 게 뭐야 도대체.


8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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