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3.

고백

 



1.

성인이 되고나서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명확하게 고백해 본 일이 거의 없는데,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관계들은 대체로 끝이 좋지 않았고, 그 고백에 대한 구두로든 글로든 답을 들은 일이 드물었다. 보통은 잠수를 타거나 연락을 끊었으니까.


짝사랑에 대한 거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역시나 박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박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퍼즐처럼 나는 그 말을 손에 꼭 쥐고 매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다. 무슨 의미일까. 어떤 박자를 말하는 걸까. 

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어렴풋이 감정의 속도, 표현의 속도, 기대의 속도의 문제였지 않을까 눙치고 말지만 박자는 단순히 속도 이상의 문제이겠지. 빠르기뿐 아니라 방향, 높낮이, 강도 그 모든 것의 조화로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우리는 좋은 합이 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서로에게 숨을 맞추면 심박수가 동일해지는 것처럼,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믿는다. 본인도 조금은 느꼈겠지만.




2.

용감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사랑을 받는 일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지킬 신념, 상처를 주고 받을 각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음 더 적어보고 싶은데, 사랑고백을 받았던 경우도 별로 없어서 사실 더 할 말이 없네 ^^




3.

쓸모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꽈리를 틀고 앉을 때에는 철학서나 사회학 서적을 본다. 좁고 황량한 내 내면에 골몰해있지 않고 거시적 세계로 눈을 돌리는 좋은 방법. 더 넓고, 크고, 오래된 눈을 빌려 써본다. 나의 고민이 얼마나 하잘 것 없었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으므로. 


어빙 고프만 책과 기든스 현대 사회학(아마 전세계 모든 사회학과에서 쓰는 교재일 듯)을 빌려왔다.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도. 착실히 읽어야지.




4.

아무도 묻지 않지만 떠들고 싶은 나의 독서 방법.

재미난 책을 발견하면 그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는 동안 읽은 논문이나 서적, 참고했다는 사상가들의 책을 찾아본다. 책에 여러 유명인사의 추천사가 붙은 경우, 가장 맘에 드는 추천사를 써준 사람(대게는 작가)들의 대표작도 한 번씩 살펴본다. 마인드맵을 그리는 방식으로.


대니 샤피로는 내가 번역했던 작품에 추천사를 써준 훌륭한 작가 중 하나였고, 현아의 책에서도 이야기가 나와서 아 이젠 정말 읽어볼 때다 싶었다. 번역은 한유주 작가가 했다. 첫 페이지부터 재밌다.



+

원래도 책 사기 전에 작가 소개나 판권 페이지를 꼭 들춰보는데, 이젠 역자 프로필도 꼼꼼하게 본다. 당사자성이란 게 참 웃기단 말이지.




2022. 9. 21.

이름

 



1.

나는 모든 이름을 알고 싶다.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테크니컬 라이터 겸 UX 라이터.

지난 33개월간 라이터라는 이름하에 다양한 용도의 텍스트를 썼다. 버튼명을 정하기도 하고, 코드를 인간의 언어에 가깝게 풀어써보기도 하고, 마크다운이라는 새 문법도 배웠다. 대체로 낯설고도 흥미로웠다. 이제는 익숙하고 친근하다. 능숙이라고 적으려다 역시나 거짓말 같아서 지웠는데, 안타깝게도 3년간 내 일에 있어 탁월하게 능숙해지지 않았고, 흥미로움 역시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처음처럼 모든 프로젝트가 깨달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여전히 고된 일도 몇 가지 있다. 가장 적응이 안 되고 골머리를 앓는 일은 이름 짓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제작할 때, 그 제품을 부를 이름을 짓듯이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들 역시 이름이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 모든 부품에 최대한 기술적(descriptive)이며, 외부인(제작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봐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적확한(concise and precise) 이름을 붙어주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인 사회성, 자의성, 창의성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프로그래밍 언어같은 경우 창의성 혹은 자유도가 높다. 가상의 언어 vava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장조사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vava라는 언어(혹은 외국어)로 설문지(코드)를 짠다고 하면, vava 언어권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사용되는 일반적 설문지 템플릿(라이브러리)을 이용해서 호다닥 설문지를 생성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만들려는 설문지의 내용과 구조가 복잡하다면 vava의 문법은 따르되 디폴트로 제공되는 옵션이름(코드명) 대신 내 설문지에 특화된 단어를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이지 않은 설문 답안(이를테면 “질문 두 개 건너뛰기”나 “여기서 설문 종료”)을 “뚜뚜뚜”나 “#$%%%” 라는 식으로 적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코드는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 기준으로 작성된다. 어처구니 없는 서구중심, 특히 미국중심환경 아니냐고 따지겠지만, 맞는 말이고, 컴퓨터가 이미 이렇게 개발되어버린 이상, 이 상황을 뒤집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신 “용건만간단히”이라든가 “이쯤에서그만” 같은 단어를 만들어서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기능이 출시될 때마다 그 기능을 구현하는 모든 레벨의 코드명을 검수한다. 고객사의 엔지니어가 코드만 봐도 이 함수가 혹은 파라미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넘어가는 것인지 유추할 수 있는가, 해당 언어의 컨벤션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수정이 필요하다면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이름 짓기가 어째서 어렵냐면, 각 언어(우리 회사는 현재 8개의 언어를 지원한다)의 특성을 이해하고 코드의 확장성을 고려하여 지어야하는데, 내가 8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고, 코드가 어느 쪽으로 확장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전자의 경우, 프로그래밍 언어 별 컨벤션을 모조리 알기 어렵고, 게다가 특정 함수 하나가 수행하는 복잡한 행위를 한두 개의 단어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특히 영어로, 아름다운 코드를 짜는 일만큼 명쾌한 답이 없다. 한편 코드 확장성(외부)의 문제는 사실 코어(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어설픈 이름을 지어준 함수가 먼 미래에 여기 저기서 수도 없이 호출되어야 하는 제품의 핵심 코드였다? 함수 이름을 이렇게 개떡같이 지어놓은 게 누구냐며 후세의 모든 엔지니어들이 분노로 찍어대는 청축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벌써부터 환청처럼 들린다. 괴상한 이름의 함수는 제품에게도, 사용자에게도, 앞으로 올 관리자에게도, 모두에게 고통이다.


여기서 아쉬워지는 것은 언어의 자의성. 사람의 이름처럼 코드 이름과 코드가 실제로 수행하는 일에 사실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 좋으련만.




3.

에스키모가 설질에 따라 십여가지가 넘는 이름으로 눈을 구별한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 비단 특수문화권에서만 존재하는 언어활용형태는 아니다. 요리를 하다보면 세상에 기름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며 제조방식이나 발효기간에 따라 수십가지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향신료는 또 어떻고. 우리나라엔 강산에가 명태의 50가지 그림자마냥 건조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생선의 이름으로 만든 노래도 있지 않은가. 어떤 분야에서 아주 드물게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이름을 캐치했을 때, 나는 한 뼘 더 우쭐해진다. 세상의 비밀을 한 어절만큼 더 알게 된다. 내 단어 주머니에 잽싸게 넣고 입구를 꽉 조여맨다. 그 이름을 꺼낼 수 있는 최적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영어에는 걷는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가 대여섯 개는 될 것이다. Roam, walk, lurk, stroll, stride 등등. 한국어라면 부사+동사의 형태로 표현했을 행동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고급(advanced) 영어로 갈수록 어휘가 중요해진다. 슬픈 얘기지만, 어휘력이 발화자의 지적 수준, 사회경제적 지위 따위에 대한 가늠자가 된다. 




4.

언어란 결국 이름의 집합. 부르고 싶은 대상이 관념이든, 물질이든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호가 이름이니 언어란 이름들의 가계도. 계보.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늘 거리가 존재한다. 결국 이름과 이름의 주인 사이에는 늘 거리가 존재한다. 언어의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름은 피부처럼 가깝게 달라붙어있고, 어떤 이름은 이름의 대상으로부터 몇 광년 거리에 존재하는 듯 하다. 

우주에서 우주를 건너는 이름도 있고, 속삭이자마자 혀끝에서 녹아버리는 이름도 있겠지.

그 거리를 재는 단위도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을 가능한 촘촘하게 알고 싶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 이름들을 소리내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이름을 잘 짓는 사람보다는 역시 이름을 잘 부르는 사람이 되는 편이 빠르지 싶다.




5.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의 이름을 아주 자주 부른다. 혼잣말로도 부르고, 코를 맞대고 있을 때에도 굳이 소리내어 부른다. 좋아서 부르던 것이 부를수록 좋아지기도 한다. 주문이 된다.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을 부르고 싶다. 기표로서의 이름은 휘발하고 기의로 남을 때까지, 알맹이가 되도록 부르고 또 부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