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5.

사랑에 대한 단편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 누가 누굴 가져야 버리는 거지.
그런 미성숙한 사고를 버리자.
알겠니? 반성하자.




2.
#1
90년대 발라드를 들을 때면 어린 마음에 노래가 다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나 같이 "왜 하늘은 널 데려갔는지" 알려달라고 목놓아 울거나 "구름 뒤에 숨어" 날 보고 있느냐고 원망하는 가사뿐이었다. 곱게 헤어진 사람들이 없었다. 다 여자가 죽어서 피치 못할 이별을 한 사람들이었다. 어른들의 연애엔 사별이 저렇게나 많은 건가, 진짜 무서웠다.

근데 생각해보면 선택에 의한 이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대였던 것 같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한번 맺은 인연이 끊어질 일도, 끊을 수도 없다고 굳게 믿던 시절이었을 거다. 그러니 이별을 하려면 둘 중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겠지. 그래서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고 이영애를 추궁하고 힐난하며 울었던 걸거고. 
이제 더는 노래 가사 속에서 누구 하나는 꼭 이승에 남아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뿐"이라며 공길같은 대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2
나는 너무 행복하면 그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버거울 땐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정말 눈물나도록 행복한 순간엔 그대로 숨을 거두고 싶었다. 더 행복한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대로 그냥 그렇게. 낙담도 아니고, 상대적 박탈감도 아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우울증도 아니다. 삶을 종료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다는 기분인데. 너무 재밌는 게임이었고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봤으니 이제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만족감.
물론 그정도로 행복한 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다. 종종 클로이스터가 떠오르는 날엔 그날 죽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진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기억 속에 새기는 그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나의 의식은 종료됐겠지. 나는 그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죽어야 완성되는 해피 엔딩.


#3
1. 어제 귀 사장님이 책을 빌려주셨다. 궁금해서 만지작 거리니 선뜻 빌려드릴게요, 하셨다. "제가 안 가져오면 어쩌시려고요?!" 믿을만 하니 빌려드리죠, 하셨지만 집에 가기 전엔 언제 돌려주실거예요? 라고 물어보셨다 ㅋㅋㅋ

2. 남이 끓여준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광화문 어딘가의 백반집에 갔다. 김치찌개를 시켜놓고 멀뚱 멀뚱 앉아있는데 아주머니가 "양배추쌈 줄까요?" 하셨다. 팟캐스트를 듣던 중이라 이어폰을 뽑으며 네? 하고 다시 물었더니, 아니, 백반에만 나가는 건데 양배추쌈 먹겠느냐고요, 하고 웃으셨다.
내가 생각했던 김치찌개는 아니었지만 양배추는 맛있었고 배부르게 잘 먹었다. 

3. 밥 먹는 동안 경력 30년이 넘은 스탠드업 코메디언의 인터뷰를 들었다. 인터뷰 말미에 인터뷰어가 자신에게 묻고 싶은 건 없냐고 물었다. 코메디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지금 뭘 입고 있냐고 물었다. 뭐 이런 변태적인 질문이람(이라고 생각한 건 내가 변태적인 걸까), 하고 있는데 인터뷰어는 초록색에 남색 땡땡이가 그려진 셔츠요, 라고 답했다. 코메디언이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드냐고 묻자 인터뷰어는 아이를 낳은 뒤로 몸이 많이 변해서 좀 고생 중이라고 했다. 코메디언은 이렇게 덧붙였다.
"Be kind to yourself. You always hear people say that, but really, be nice to yourself. The world is not out to make you feel better. It can sometimes, but in general, you are in charge of being nice to yourself. You are the only one you've got when you get up in the morning."
누군지도 모르는 코미디언의 말에 툭하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등에 툭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4. '#보건교사안은영'은 다 읽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중간에 몇번 잠시 쉬었는데, 오른손은 책갈피처럼 책장 사이에 껴두고 왼손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고 유쾌한 글을 쓸까' 부러우면서 좋기도 하고 문학적 깊이고 나발이고 이런 글을 쓰는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읽는데 역시나 상냥해서 또 눈물이 터졌다. 

5. 새까맣게 탄 애가 목 늘어난 티셔츠에 바지라고 부르기 민망한 숏팬츠(라고 친구들이 말하지만 나에겐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여름 교복)를 입고 책을 펼쳤다 덮었다 하며 울고 있으면 그건 접니다.


#4
1. <시인의 사랑> 중,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인이 돼요?"
"시인은, 대신 슬퍼하는 사람이야. 사람들을 대신해서 슬퍼해주는 사람. 시인은 슬퍼도 괜찮아. 왜냐면 시인에게 슬픔은 글을 쓰는 재료가 되거든."

1-1. 내가 좋아하는 시가 나왔고, 양익준 연기가 참 괜찮아서 참 놀랐다.

2. 일희일비하지 않게 해주세요.

3. 안부 인사를 넣고 싶은데 사실 한 번 무시당했다. 문자로 보냈으니 읽고 잊었거나 읽어야 할 이유를 잊었거나, 그도 아니면 잊어서 읽지 않았거나.
해명하고 싶은 사람만 자꾸 늘어나는 서른.

4. 소녀는 타고난 도둑입니다
어려선 부모의 꿈과 청춘을 앗아 제 배를 채웠고
커서는 제 변명을 하려 수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빌리고 단어를 훔쳐다 썼습니다
평생 그렇게 자란 소녀는 무엇이 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소녀의 도벽은 혀도 앗아갔습니다
소녀는 그밤의 가장 낮은 옥상, 철무덤 아래 제 혀를 묻고 왔습니다
꺼내어 묻고, 주인에게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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