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현이는 ㅅ를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대외활동을 통해 서로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저 서로의 카카오톡 연락망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 별다른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때때로 명절을 핑계삼아 안부를 묻곤 했지만 둘의 대화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낯선이와 대화를 할 때에도 주도적인 도현이는 이상하게 ㅅ과 문자를 할 때면 항상 맥이 빠졌다. 어딘가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도현이는 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농담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고 달변가도 아닌 ㅅ를 어눌한 오타쿠 같다며 귀여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2.
그러던 도현이는 ㅅ를 좋아하게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눈길이 갔는데 자꾸 주변 친구들이 좋다고 야단법석을 떠니까, 그 무리 중에 하나로 섞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도현이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도현이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를 이야기 할 때면 꼭 입술을 꽉 다물고 콧잔등과 미간에 힘을 줬다. 그럼 그 짧은 콧등이 도현이의 자존심처럼 구겨졌다. 확실하진 않다. 원래 돌이켜 생각해본다는 건 가장자리가 닳은 기억의 조각들 중 얼추 비슷해 보이는 모서리를 가진 조각끼리 이어붙여 피카소의 그림같은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일 뿐이니까.
도현이는 ㅅ와 일 년에 한두 번 카톡으로 안부만 묻고 지내는 건 뭔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둘 다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3년만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날 이후 도현이와 ㅅ은 한 달에 두어 번 저녁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꼭 저녁에 만나 아침에 헤어졌다.
3.
"사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야."
도현이는 말을 골랐다. 자주 본다고 혹은 틈만 날 때마다 생각난다고 해서 그 둘이 필연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순 없다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인과관계도, 상관관계도, 비례관계도, 그냥 뭣도 아닌 것 같아. 방정식이나 함수같은 산술적 논리에 비산술적 기호를 대입시키면 그 시스템은 마비되잖아? 그런거야. 감정이란 변수가 생겨나면 남+녀=?라는 식은 깨질 수 밖에 없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수학적인 식으로 측정하거나 논리로 일반화 시킬 수가 없는거야. 인풋과 아웃풋의 등가가 성립할 수 없더라고."
4.
"걜 만나려면 침대로 가는 수 밖에 없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기엔 너무 비겁하고 비참한 장소란 걸 알면서도 자꾸 침대로 돌아가."
5.
도현이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하지만 잠자리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두려운 건 섹스가 아니라 그 앞 뒤로 이어지는 관계 유지야. 얘도 나를 한 번 어떻게 해볼 생각뿐이었을까? 이 관계는 여기서 종료인가? 다음날 아침에 헤어지면서 연락할게요, 담에 또 봐요, 하고 두 번 다시 못보는걸까? 그런 것들 말이야. 나는 그 사람이 좋아서 함께 있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제 나는 용도폐기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게 너무 싫어."
6.
다행인지 불행인지 ㅅ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도현이는 그 후 2개월간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그러는 내내 그는 도현이를 최대한 이성적이며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는 그가 도현이와 사귈 수 없는 이유, 앞으로 유지하고 싶은 관계의 형태, 그에 대한 도현이의 예상답변까지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어이가 없을 만큼 공손한 어투로 설명해주었다. 도현이는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논리정연한 탓도 있었으나 그는 인간적 예의를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정갈한 숙소에서 만났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의 태도가 돌변하는 일도 없었으며 항상 도현이의 귀가길을 챙겼다고 한다. 약속을 정하거나 거절할 때에도 간결하고 정확했으며 다시 연락을 주겠다 말하면 반드시 날짜를 지켜 연락을 해왔다. 관계를 정리할 때에나 도현이의 심기가 불편할 때에는 반드시 만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현이는 개새끼라고 욕을 할 수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도 없었다. 뭐하는 짓거리냐는 친구들의 비아냥에도 도현이는 그 사람의 비정상적인 냉철함이 고마웠다고 한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의도 하지 않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게 얼마나 자신의 연애관을 기형적으로 비틀어 놓았는지 일일이 다 일러주고 싶었지만 도현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힐난을 조용히 들으며 콧잔등만 찡그릴 뿐이었다.
7.
그래도 도현이 우리 중에 가장 용감했다. 도현이는 '다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한 번은 자리를 만들었고,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 우리는 도현이의 헤픈 정이 한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도현이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기다렸다.
대부분은 "야, 망했어"로 시작했다. 도현이는 늘 "그래도 사람이 삼 세 번은 봐야 하는 거 아니니? 오즈 야스지로 말 몰라?" 라고 씩씩거렸다.
도현이가 알려준 오즈의 말은 통찰력이 뛰어난 연애론이었지만 도현이가 왜 오즈의 말을 그토록 신봉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도현이가 언젠간, 도현이만의 오즈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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