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닥치는 대로 걍 쓰기.
1.
금요일에는 오전 수업에 어김없이 지각했다.
정말 그러기 싫은데, 아침 10시 수업조차 정시에 도착하지 못하는 나의 잠만보 기질이 너무 화딱지가 나는데, 그래도 졸린 건 졸린 거다.
순차통역 수업이라 수업의 절반은 실습으로 이루어진다.
1분 가량의 음성파일을 듣고 나면 (듣다 보니 선생님이 직접 읽고 녹음한 파일들이더라) 기억나는 내용을 바탕으로 통역을 한다.
첫 시간은 영어에서 한국어, 그 다음 시간은 한국어에서 영어로. 파일을 듣기 전에 무작위로 한 명씩 호명해 발표를 시키는데, 선생님은 금요일 수업 때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한두 문장 까먹고 통역해서 속으론 아이고야, 했는데 선생님은 이정도면 최상위 그룹에 들겠다며 공부한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셨다.
조용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고, 두 달이냐고 물으시길래, 2주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적은 없다.
혹시나 그러면 어떻게 하지, 고민한 적은 있지만 대학 입시 때처럼 알 수 없는 예감이 있었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혹은 근자감)이고, 내 실력은 도대체 어디쯤에서 멈춰있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얼마나 공부를 하고 오나. 어느 정도 실력으로 시험을 보나.
그런 걱정이 선생님 피드백 한 마디에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나서길 잘했다 안심도 됐고 다음 번에도 잘한다 칭찬 들어야지, 동기가 생겼다.
이 뭣도 아닌 것 같은 일화를 칭찬 듣고 싶은 누군가에게 상소하고 싶었지만
말 할 사람이 없었다.
친구가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아휴 장하네" 하고 두 배로 칭찬받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아니. 그짓말이다. 사실 그런 사람이 있긴 있는데, 그 사람에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밀린 이야기만 자꾸 늘어가고 우리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는다.
니가 이 글을 꼭 보면 좋겠다. 그리고 그냥 "장하다 우리 나연이" 하고 문자 한 통 해줬으면 좋겠다.
ㅆㄴㅁㅅㅋ.
2.
얼마전에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내가 유일하게 책 추천을 요청하고 수긍하는 독서 스승님께서 일러주신 책. (보고 있는 거 다 안다. 메롱)
책을 추천할 때면 늘 "나연씨는 좋아할 거예요" 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역시나 나를 간파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뭐, 쫌, 재밌네요" 하고 틱틱거린다. 그럼 또 내 어설픈 서평을 다 들어준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많이 보고 배운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바르고 곧게 전달하는 법, 문자 중간에 시간이 뜰 때 사과하는 법, 상대방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꼭 필요한 때에 필요 이상의 감정은 제하고 설명하는 법.
그리고 좋은 것을 나누는 법.
3.
그 분은 레트로 마니아를 정지돈 작가에게서 추천받았다기에 교보에 들른 김에 그의 책을 찾아봤다. 건축이란 단어는 어디다 갖다 붙여도 핵 멋찌므로 뭔가 구조적이거나 산술적으로 쓴 소설일 줄 알았는데, 이게 왠 걸? 이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역사 소설 별룬데, 하면서 이미 책을 집어들었다. 책은 대개 만화책이나 잡지를 포장하는 얇은 비닐에 싸여 있었는데, 뒷편에 눈먼 부엉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습자지만큼 얇은 종이에 인쇄, 네번 접어 부록으로 함께 주고 있었다. 여자는 디테일에 약하다지? 바로드림으로 결제.
같이 간 지혜가 황인찬 시인의 종로사가를 읽어주기에 나는 심보선 시인의 눈앞에 없는 사람을 꺼내 맨 앞 시구절 중 맘에 드는 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4.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단 하나, 말을 섞는 거였다. 시시껄렁한 얘기여도 좋으니 니 얘기를 듣고 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 니 인생엔 어떤 것들이 피고 지는지, 그리고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터놓고 말할 수 있었음 했다.
나는 그저 영화를 보고 서점을 가는 다소 시시한 주말 동선이 어떻게 내 세계를 구축했는지 아주 작은 벽돌에서부터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너는 늘 말이 없다.
니가 하루만큼 또 싫어졌다.
5.
오늘은 내 일기 반, 남의 일기 반.
물론 내가 니 얘기를 해봤자 넌 니 얘긴 줄도 모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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