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31.

<에덴의 강>, 리차드 도킨스





1.
어렸을 때, (아마 한 학기 동안) 유전공학자가 꿈이었다.
당시에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진 모르겠지만) 과학실험 동아리 회장도 맡고 있었고
지도 교사였던 생물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요구르트 장난감의 원리를 (때려) 맞추자, 과학 영재 교실에 추천해주셨기 때문에 다소 급조된 과학도 여중생이기도 했다.
그래도 물리는 재미있었다. 공식을 달달 외울 때만 해도 그게 물리인지 화학인지 잘 몰랐지만 뉴턴과 무게, 속도와 운동에너지 같은 것들은 도무지 실체를 가늠할 수가 없어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세계처럼 보였다. 진심으로 과학고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장래희망이 물리학자가 아니었던 이유는 유전 공학이 좀 더 미래주도적인(이라는 즉슨 유전도 공학도 정확히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선 낯선 것은 멋있다는 중딩적 발상) 학문같았고, 과학 교실 추천 교사의 담당 과목이 생물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난 이틀 간 <에덴의 강>을 읽으며 나는 자의적 선택에 의해 과학자가 안 된 것이 아니라 내 유전자가 결정한 생존방식에 따라 과학자는 못될 '팔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2.
고등학교 때, 나는 여전히 이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수학을 좋아했다. 모두들 알다시피 좋아한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다. 수학은 숫자를 포함한 기호와 그 기호를 사용하는 규칙들을 배우는 과목이다. 다양한 규칙을 정확하게 숙지하기만 하면 연결고리가 끊어져 문장 속에 어지럽게 흩어져버린 기호들, 혹은 결과값이 지워진 기호 문장들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정답'을 얻을 수 있다. 수학은 그 기본 원리 자체도 명쾌하지만 또 동시에 보상관계 역시 명확한, 뭐랄까, 쿨한 과목이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과학을 정말 좋아했다. 특히 화학과 물리. 다양한 과학 과목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수학적인 분야였다. 음이온과 양이온값을 띠는 분자들이 만나 합이 되는 과정이나 관성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들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애정사를 포함한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는 훌륭한 과학이론이었다.
그래서 일단 지망 분과에는 "이과"를 적어 냈고 개학날에도 2학년 11반인가, 13반인가, 이과반에 배정되었다. 하지만 시간표를 보자마자 전과 신청서를 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수학은 좋아하지만 잘하지 못했다. 난 잘하지 못하는 일을 계속 하다보면 좌절하고, 자기 폄하와 부정의 길로 빠지는 타입이기때문에 일주일에 수학을 8시간 씩 배운다(면 당연히 시험을 보겠지)는 것은 곧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2, 고3을 의미했다.
3월 3일에는 프랑스어 전공 문과반으로 등교했다. 정말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
문제는 사회과목이었다. 언어도 물론. 그리고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는 폭탄 선언도 했었다. 책도 좋아하고 글도 곧잘 쓰면서 언어는 늘 2-3등급이었고 사회문화는 69점을 받은 적도 있다. 좋아했던 미술도 내 길이 아님을 인정하고 이과에서 문과로 옮겨오고 나니 더는 하고 싶은 공부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은 안 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들도 나도 답답하긴 매한가지. 
재밌는 건, 사회문화 선생님이 어느 날 교무실에서 빈둥거리던 날 옆자리에 앉히시고는 꿈이 뭐냐, 뭘 하고 싶냐, 고민이 있느냐 이것 저것 여쭤보셨다. 담임쌤도 아니었는데, 나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는지 얘길 하다말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니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거야. 그럴 땐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해. 뭐든 다 잘 할 필요 없어." 라셨는데, 그 말이 되게 좋았다. 그리고나선 비문학이 어려우면 '자본론'이나 '군주론' 같은 책들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네? 제가요? 자본론이요??? 에이" 하고 코웃음을 쳤는데, 그로부터 5년 후 나는 사회학도가 되었다.



4.
전공은 전문 지식을 쌓은 분야를 일컫는 단어이니, 이쯤 되면 내 전공은 사회학이나 통번역이라기 보단 김나연인생학쯤 되시겠다. 인생에 대해 보편적 진리나 통섭이 가능한 가설 같은 걸 내세울 순 없지만 산술적 사고를 통한 의사결정이 갖는 한계 같은 것들은 수학적으로 설명해 볼 순 있을 것 같다. 이건 담에 좀 자세하고 멋지게 써보기로 합시다.



5.
입사 후 2년간 했던 일 중에 가장 흥미로웠고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내 자료 데이터베이스화,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검색 및 가공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난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도 html이 뭔지 몰라 워드프레스를 때려치고 블로그스팟으로 옮겨왔다. C언어며 자바며 알 리 없지. 대신 기획을 맡았다.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활용하고 싶은데, 그럼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이런 기준으로 분류하며 여기서 저장되는 데이터는 저기서 이런 식으로 출력되고, 그 페이지는 어쩌고저쩌고.
처음엔 정말 1도 이해가 안 되다, 어느 순간 이 업무는 입력 방식만 생각할 게 아니라 출력 레이아웃을 구상하고 그에 맞춰 데이터가 정리될 수 있게 분류 기준, 규칙, 다양한 입력 조건에도 일관성 있는 결과값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알고리즘 따위를 한꺼번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체적 사고의 세련미나 고차원성에 반했달까?



6.
아마 그래서 인공지능이니 프로그래밍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생겼는데, <에덴의 강> 39쪽에서 이미 한 차례 막혔고 1장을 읽는 내내 "...?????????????????????" 했다.
예컨데, "디지털 전화에서는 단지 두 가지 전압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선을 타고 흐른다. 정보는 전압 그 자체에 실리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전압의 변화 패턴에 실린다. 이것을 펄스 부호 변조라고 부른다"는 이 네 문장 사이에서 나는 완벽하게 미아가 되었다. 그러다 세 장만 넘어가면 '펄스 주파수 변조' 라는 충격 회수의 증폭 (그래서 주파수) 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7.
나는 정말 변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도 이해가 안되는 페이지를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 조바심이 났다.
제대로 알고 싶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학문간의 둑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허공에 떠있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에게 가장 적확한 비유의 외투를 입혀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는 늘 매혹적이다.


PS.
그래서 <에덴의 강>이 1장만 넘어가면 일단 괜찮다는 이야기.



댓글 4개:

  1. 그...유전공학이란 게요, 공부해보니 미래주도적인 학문이 아니더라고요. 뭔가 성과주의 사회에 걸맞는, 그러니까 10 개의 씨앗으로 1만 개의 작물 생산에 초점이 맞춰진 과욕의 학문. 제가 몸소 느낀 건 그렇습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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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땐 공학이 뭔지를 아예 몰랐으니까. 근데 공학이란 게 그런거잖아, 효율성이 높은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기존의 시스템에서 효율성/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유전공학도 그럼 결국 유전 정보나 유전자가 정보를 전달하고 발생하는 방식을 '어떻게 인간에게 (특히 경제적 자본의 측면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제어 및 조작'할 수 있을까, 겠지. 희석이 서울 안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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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수이자 고시생이라서 차비가 없네요. 조만간 원고료 좀 쌓이면 상경하겠슴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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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보구팝<3 오필리아 보며 내 생각 많이 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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