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1.
적산가옥.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이곳을 사람들은 적산가옥이라 부릅니다. 인력거를 흉내낸 자전거가 관광객을 싣고 와 대문 앞에 서고, 대문 안 정원에선 싸구려 치마 저고리를 입은 소녀와 황토색 차이나 카라 교복을 입은 소년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장대 끝에 달린 카메라로 기념 사진을 찍는 곳. 마른 연못, 텅빈 집안, 새로 고쳐 단 목재 비늘 판자. 네, 아버지, 햇병아리의 온기를 지닌 연노란색 햇살이 큰 창을 통해 스며 들어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던 곳. 그 시절의 생기가 가신 채 껍데기만 남은 이곳, 저와 동생이 태어나고 또 아버지가 눈 감으셨던 우리집에 왔습니다.
이 집 창틀마다 아로새겨있는 추억같은 것이 보일 리 없는 관광객들 틈바구니에 섞여 2층 제 방을 올려다 봅니다. 기억하세요? 소학교 입학하던 날. 학교에서 돌아온 저를 한쪽 팔로 번쩍 안아 올리시곤 반대손으로 제 눈을 가리셨었습니다. "2층 방에 마츠코의 선물을 가져다 놓았다" 하시며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마다 저보다 더 설레하셨었죠. 제가 등교한 사이 당신의 포목점에서 가장 고운 순백색의 명주천을 떼어다 커튼도 달아두시고 배나무로 직접 짜신 침대도 들여놓으시고는 큰 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는 그 방 창틀에 기대어 손수 달아주신 커튼 위로 듬성듬성 내려앉은 새하얀 꽃송이들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세월에 절어 누렇게 바랜 그 커튼이 아직도 걸려있는 것을 보니 뽀얗게 쌓인 먼지 아래로 숨죽인 모든 세월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데, 저는 이제 이 집 밖을 돌며 소원합니다. 무엇이 저를 이리도 멀리 떠밀어냈는지, 어떻게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일러달라고.
낯 뜨거우리 만치 바짝 마른 연못 가운데에 서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도 보입니다. 그 연못에는 아버지가 아끼시던 주황색 잉어들이 있었지요. 집안에 있는 동안은 정원의 분재와 수국을 보살피며 연못을 유영하는 잉어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에 낯선이가 드나드는 일을 늘 경계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었지요. 손님이라곤 모퉁이 돌아 하얀 담장 안 단층집에 살던 제 동무 쿄코가 아니면 아버지에게 돈을 꾸러 온 소작농들이 전부였습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아버님 앞에서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던 그네들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던 패망소식보다 먼저 우리집으로 달려올 적에도 아버지는 연못 속 비단잉어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까(赤), 히(緋), 키(黄), 고멘네." 피난하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오느라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챙기지 못했죠. 그 급박한 순간에 어찌하여 잉어들에게 미안하다 하셨던 것인지 저는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미안해야 했던 것은 잉어들이 아니었건만.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응당 부끄러워야 할 일에 대하여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부덕으로 여겨지던 때. 악의가 대의였고 그래서 선의였던 때.
돌아온지 채 한 해도 안 돼 아버님 돌아가시고, 저와 동생 역시 터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못할 집은 저와 사치코 둘이서 지키기엔 너무나 황량했습니다. 우리가 떠난 우리집에 이리 많은 사람들이 오가게 되리란 것을 아셨나요, 아버지? 반세기동안 주인이 여럿 바뀌며 낯선 이들은 한 겹 한 겹, 우리집을 발가벗겨 내었네요. 아버님이 열 다섯 생일날 사주셨던 자개무늬 경대며, 유난히 매섭던 그곳 겨울에도 정원을 내다볼 수 있도록 문가에 두셨던 고타츠며, 집안 세간살이들을 모두 들어내고 여기, 헐벗은 집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아버지의 서재가 이리도 어두웠던가요? 다다미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던 거실이 이리도 휑하였던가요? 너무 많이 누렸던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전쟁이나 역사와 같은 말들은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이라 제 작은 세상은 그저 휘몰려가기 바빴습니다. 우리가 누렸던 세월은 다 무엇이었나, 그 시절은 어디에 있나, 아버지, 소녀는 예순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생이란 그저 꿈이었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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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군산에 다녀왔는데 저는 무슨 생각으로 다녀왔나 반성하게 됩니다 잘 읽었어요
답글삭제어휴 반성은요 무슨. 그냥 너무 묘한 공기가 있는 곳이더라구요.
삭제어떻게 이렇게 쓰지요? 좋아요..
답글삭제마지씨가 이렇게 재밋어 해주시니 좋으네요 흐흐흐 근데 저긴 정말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에요. 정말... 아 다시 가서 하루 종일 앉아있고 싶고 집안도 둘러보고 싶어요. 더 긴 글로 써보고픈 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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