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8.





오늘은 감귤초콜렛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1.
제주도를 처음 가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이었다.
그땐 이토록 긴 인연이 될 줄 몰랐던 첫사랑 옆반 남학생을 막 알아가던 시기기도 했다.
짧은 곱슬머리에 꾸밀 줄도 몰랐지만 그래도 딴엔 예뻐보이고 싶어 새 옷에, 새 운동화에, 렌즈까지 끼고 갔던 수학여행. 하지만 그 남자아이가 같은 반 여자아이와 단체 활동에서 이탈 했다는 소리만 2박 3일 내내 듣고 있어야 했다. 
그 와중에 제주도 친가 식구들은 3년 만에 조카를 만난다며 숙소까지 찾아왔다. 사는 곳도 멀기만한 그쪽 식구들과 나 사이에 공통분모라곤 아빠뿐인데, 그 공통분모가 증발해버리고 나니 딱히 서로 볼 일이 없었다. 특히나 이제 한창 사춘기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고생이 얼굴 마주할 기회도 없는 고모들에게 시간내어 연락한다한들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래도 친할머니, 고모, 고모부는 서귀포에서부터 제주시 숙소까지 달려와 한라봉 한 박스와 도톰한 돈 봉투를 손에 쥐어주고 가셨다. 한라봉도 돈 봉투도, 그리고 그 물건들 위에 잔뜩 올려진 그들의 미안함도 나에게는 다 너무 무거웠다. 고마우면서 싫고 궁색해서 슬펐다.
다음 날, 나는 낮술 한 취객처럼 전날 받은 돈을 아무데나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관광코스 초입길에 쪼그려 앉아 한라봉을 파시던 아주머니한테 한라봉 한 박스를 사고, 그 다음엔 관광버스 대절 업체의 친척뻘이 운영하는 곳이 분명하리만큼 후질구레한 기념품 가게에서 감귤초콜렛과 백년초 초콜렛 네 박스를 샀다. 내 짐이 작은 캐리어 하나에다 한라봉 두 박스와 초콜렛 네 박스로 늘어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는 아니었지만 집에 도착하니 감귤초콜렛은 절반 정도가 녹았다 다시 굳어 포장지에 들러붙어 있었다. 엄마에게 수학여행 후 남은 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콜렛도 나 혼자 모두 먹었다. 얼려두고 조금씩, 다 먹어치웠다.



2.
그는 반 년간 두 번이나 제주도에 다녀왔다. 처음엔 혼자 다녀온다했고 두번째는 가족들과 함께라고 했다. 그럼 올 때 감귤초콜렛 한 박스만요, 하고 부탁했다.
여행가는 사람에게 자질구레한 선물을 잘 부탁하지 않는 편이지만 친구들이 굳이 물어오면 보통은 그 나라의 영수증이나 얇은 동화책, 자석을 사다달라고 한다. 물론 그건 언어가 다른 국가에 가는 친구들에게 하는 이야기.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에겐 그저 '감귤초콜렛'을 사다달라 한다. 여행 선물 중 최악으로 꼽히는 것이 초콜렛이라지만 나는 좋다. 받는 사람이 좋다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뭐 몇 만원 씩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감귤초콜렛'이 먹고 싶다 했다. 여행하는 동안 도처에 널린 감귤초콜렛을 보며 나를 생각하시란 의미로 사다달란 것도 아니었고 여기서 못사먹을 희귀한 음식이라 사다달란 말도 아니었다. 그저 여행을 간다기에 진농처럼 건낸 말이었는데, 그는 두 번 다 초콜렛을 사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나의 작은 부탁들을 꾸준히 까-먹었다. 자신이 한 약속들도 까-먹었다. 입과 손이 심심하고 궁금하니 그냥 다 까먹고 싶었던 모양이지.
별것 아닌 부탁이었는데 정말 별것도 아닌 취급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 감귤초콜렛이 도대체 무어라고. 궁색하고 슬프기만 한 까만 설탕덩어리.



3.
너는 모른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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