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석이라 그런가
스쳐지나간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온다.
어제는 둘에게 연락이 왔는데, 욱이랑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에 남아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렀다.
2.
욱이와는 10년 전에 인스타로 알게 되었다. 당시 욱이는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인스타에 올리는 내 글이 맘에 들었다고 댓글을 달고, 디엠을 주고 받다 나는 욱이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가까워져 2016년 뉴욕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뉴욕에 방문했을 때 욱이를 세 번쯤 만났는데, 두번째인가 세번째 만남에 우리는 재즈바를 가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동선 상 코니 아일랜드를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욱이의 기억에 의하면 주소도 동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낯선 곳의 바였다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내가 구글맵에서 찾아낸 조그마한 라이브 재즈바였고 욱이는 분명 관광객이 갈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을 그 동네에 굳이 굳이 가고 싶다는 나를 의아하게 여기며 나를 따라 메트로에 올랐다.
메트로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구글맵에서 알려준 대로(당시에는 실시간 길안내라든가 하는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미리 프린트해간 디렉션을 참조해 방향을 잡고 10초 가량 지연되는 구글맵의 현재 위치 버튼으로 동선을 역추적하며 움직였다) 낯선 역에 내려 지상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주택가 골목마다 오렌지맛 알사탕같은 가로등만이 멀뚱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코니 아일랜드에서 고작 15-20분 정도 이동했을 거 같은데, 마치 사일런트 힐로 미끄러져 들어온 사람들처럼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이 이끄는 대로 정적이 감도는 차도를 건넜다. 정말 세상 사람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설령 그런 SF영화같은 상황이 아니라하더라도 이렇게나 고요한 거주지역에 힙하고 감명깊은 재즈바가 있을 수가 있는 걸까, 욱이를 기어코 이곳으로 이끈 나는 이 무안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이기 시작해 꼬깃꼬깃한 A4용지를 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적막 속 산책 끝에 우리는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가게 앞에 당도했다. 주중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라이브 바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희미한 말소리만 들리는 술집이었다.
"여기 맞아??"
"아, 엄, 잠깐만. 아니 근데 지도 상 보면 여기 맞을 거 같은데, 이 길에 이거 말곤 가게가 없는데?"
누가 주문을 받으러 왔는지, 얼마나 그곳에 머물렀는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출입구 옆으로 난 창가 자리에 앉아, 욱이는 맥주를,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시며 서로 말 없이 앉아 있었던 것만큼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때 느낀 당혹감과 무안함 같은 것들도. 우리는 그곳에 머문 내내 창밖을 주시했고, 아주 가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일자로 길게 뻗은 가게 안쪽의 라이브 스테이지를 응시했다. 나는 그때마다 제발 누군가라도 올라와 아무 곡이라도 연주해 이 당혹감을 녹여주기만을 기도했다. 욱이가 지루해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불안감과 책임감에 무엇이든 좋으니 어떤 사건이 벌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창밖을 내다보는 내내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고,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조차 우리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 미동조차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춘 듯했다.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극강의 공허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고 있기는 한 것일까. 무의 상태를 잊고자 다른 감각으로 사고의 초점을 옮기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라이브 재즈바라는 구글맵의 리뷰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를 제외한 모든 이의 소리가 음소거된 듯한 공간이었다. 술자리에서 흔히 들릴 법한 소리가 부재했다. 그곳에는 박장대소를 하는 사람도,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분명 도로를 따라 차들이 주차되어있었고, 가게 안에는 드문드문 떨어져 앉은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쩐지 모두가 실존하지 않는 환영처럼 느껴져서 앨리스가 굴러떨어졌던 토끼굴 속 이상한 나라 같기도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세계의 끝, 일각수 마을같기도 했다.
욱이는 어제 통화하는 중에도 뉴욕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묻고는 자기는 그날 그 바에 갔던 일이 여태 기이하고 웃기다며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고, 익히 서너 번은 들려준 감상을 처음인 것 마냥 신이나 이야기해주었다.
3.
오늘 보니 블로그 최신 글이 "요즘 자주 운다"로 시작하던데, 지난주도 자주, 많이 울었다. 사랑하던 동료들을 올해 넷이나 잃었다. 내가 사랑한 건 회사가 아니라 우리팀이었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회사에 얼마나 더 남아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매달 대출이자가 발생하는 세입자요, 본가로 소액이나마 집세를 보태야 하는 k-장녀라 함부로 퇴사선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장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심경이 복잡하다.
그 와중에 태국 너무 가고 싶네. 역마살이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