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리버 색스의 책에 딱히 큰 관심은 없지만 언젠가 찾아 읽고 말겠다고 다짐한 그의 저서가 있다.
나의 오랜 적, <편두통>. <편두통>은 심지어 그의 첫번째 책이다.
2.
편두통이 처음 시작된 건 19살 무렵이었다. 마귀할멈의 집에 살 적이었고, 100% 스트레스성으로 발현된 두통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 후로 15년 넘게 두통을 달고 산다.
처음엔 편두통이 뭔지 몰랐으니, 그냥 스트레스성 두통인 줄 알았고, 애드빌도 타이레놀도 듣지 않아 아침부터 온종일 앓아 눕다 토하다 또 눕다를 반복하고나면 탈진 상태로 잠들었고, 다음 날이면 통증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무기력증이 대신했다. 멍청한데다 나의 안녕에 관심이라곤 1도 없었을 마귀할멈 덕분에 나는 두통이 찾아올 때면 마취 없이 신경치료 받는 치통 환자처럼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인내심으로 견뎌내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고질적 두통이 불규칙하지만 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발현되었다. 내가 겪는 두통은 두개골 전 범위에서 통증이 발생한다. 두통은 수면 상태일 때 시작된다. 통증때문에 새벽녘에 잠에서 깨면 눈 앞에 섬광이 보이다 슬슬 어지러워지고, 그러다 뒷통수부터 관자놀이 할 거 없이 특정할 수 없는 부위에서 압착기로 뇌를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뇌가 찌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점진적으로, 그러나 빠르게 상승하는 커브 곡선을 그리며 절정으로 향해가는 동안 구역감이 올라와 통증 초반에 먹은 진통제까지 다 토해내게 만든다. 이쯤이면 대가리(통증이 심해지면 욕이 나올 수 밖에 없다)를 총으로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통증이 극심해지다 서너 번 더 토하고 나면 탈수 상태가 되고, 그러면 그제사 어딘가 기대 앉아 숨이라도 쉴 여유가 생긴다. 통증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누울 수 조차 없는데, 이상하게 누운 자세가 두통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빛이나 텔레비전 소리조차 견딜 수 없는 자극으로 느껴져서 두통이 시작되면 집안에 그 누구도 전자기기를 틀지 못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고, 방문을 꼭꼭 닫고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둠 속에 앉아 혼자 숨을 헐떡거리며 울었다.
이게 보통 2-3시간 안에 전개되는 증상이다. 새벽 5-6시쯤 깨면, 근처 내과가 문을 여는 9시까지 혀를 깨물며 견디다 날이 밝아오면 병원으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일반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으로는 통증이 잡히질 않았고, 응급실에 실려가 아이비와 진통제를 두 통쯤 비워야 제정신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새벽에는 경미한 근육통 정도로 느껴지다 출근을 한 후에나 학교에 가서 두통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번은 학교 근처 병원에서 한 번, 그걸로도 안 돼 조퇴하고 간 병원에서 또 한 번 진료를 받다 (중간에 도저히 구역감을 견딜 수 없어 두어번 화장실에 다녀왔고) 탈진해서 기절하기도 했었다. 눈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이쯤 되니 이것은 그냥 두통은 아닌 듯 했다. 친절한 네이버 검색을 통해 편두통(두통의 한 종류겠거니, 뭔가 그래도 일반 두통보단 심각한 건 거 같아서 일단 검색부터 해봤다)을 검색해보니 전조 증상이며 통증 발현 형태가 내 증세와 비슷했다. 다만 내 두통의 경우 편두통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한쪽 “편”에서만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다소 긴가민가 했다. 그래도 내 증세와 가장 비슷한 병명이었기에, 그 후로는 증상이 없을 적에 미리 내과에 가서 편두통 약을 처방받아두었고, 여행을 가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는 자리에는 꼭, 꼭, 약을 들고 갔다. 내 머리통은 약의 명령을 들을 때도, 듣지 않을 때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똑같은 증상을 얘기해도 돌아오는 답은 "편두통인 것 같네요" 같은 소리 뿐이었고, 매번 처방해주는 약도 비슷했다. 이걸로는 안 듣는다고, 저번에도 그래서 어쩌구저쩌구 설명해봤자 그들이 차트에 뭘 적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내 고통의 토로를 정말 참고는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10년 넘게 앓고 있는 이 처참하고 끔찍한 고통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또 아파서, 편두통이 시작되면 울고 싶지 않아도 눈물이 절로 났다.
3.
3주 전인가, 런칭 준비를 하느라 열흘 정도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이어졌는데,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병원에 가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안 될 레벨의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두통이 시작될 즈음에 이미 한 번 크게 토하고 탈진했다 기운을 조금 차렸던 건데, 후로 음식도 제대로 먹질 못하고 머리는 계속 아프고 와중에 질염 때문에 항생제는 계속 먹어야했어서 정말 족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제품 런칭과 함께 씻은 듯이 나아서(^^) 아, 스트레스성이었나보다~~ 하하하~~ 하고 안도했더니 오늘 오전에 또 섬광이 보이는 거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집 근처 신경과를 검색해봤다. 전에 멜멜님이 세란병원을 추천해주셨는데, 오늘 검진예약 하면 한 한 달 뒤에나 가능하겠다 싶어 그냥 집 근처 병원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두통 오면 또 바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하니까.
다행히 오늘 빈 진료 시간이 있었고, 전화를 끊자마자 택시타고 달려가 원장님을 만났다. 언제부터 증상이 있었는지, 주로 어떤 증세로 나타나는지, 전조 증상이 있는지, 두통이 오면 어디가 아픈지 등을 물어보시더니 뇌혈류 초음파를 보고 안진 검사를 좀 받아보는 게 좋겠다시며 일주일 내내 두통이 있으셨으면 너무 힘드셨을 거 같다며 고칠 수 있다고, 제가 낫게 해드리겠다고 웃으셨다. 의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았던 그 말이 너무나 생경하게 들려 검사 받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병원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몇번이나 되나? 낫게 해드릴게요. 약속같기도 하고, 예언 같기도 하고, 응원 같기도 한 묘한 말이었다.
4.
오늘 진료를 통해 동공지진이란 게 실재하는 의학용어라는 사실을 배웠다. 안진 (眼震): 의지와 관계 없이 안구가 제멋대로 겉도는 상태를 뜻한단다. 뇌혈류 초음파를 통해 두개 내외 혈관에 혈류량이나 속도가 어떤 상태인지 검사하고, 안진 검사를 통해 균형감각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했다. 30분 정도 검사를 받은 후 결과를 들어 진료실에 다시 들어갔더니 전형적인 혈관성 두통이고 혈류장애가 심한 상태라 2주정도 약을 먹고 경과를 다시 보자고 하셨다. 안진도 심해 현재 균형감이 완전히 깨져있고, 그로 인해 어지러움증이 심하실 거라며 그것도 같이 봐야 할 것 같다고. 15년 넘게 달고 산 통증을 두통 혹은 편두통이라는 희미한 이름으로만 부르다 혈류성 두통이라는 기술적 병명, 뇌혈관 문제라는 병인, 의학적으로 확인된 증세를 듣고 나니 (머리는 여전히 띵하지만) 속은 조금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우울증 판정을 받았을 때처럼.
5.
오늘도 두통이 있었던지라 말초혈관 수축에 도움을 주는 뭐라고 수액 맞고 가라셔서 수액실에 누워있다 혈관성 두통을 검색해보고 싶어졌다. 나같은 사람이 많나, 학계에선 정말 이걸 질병으로 보나?
그러다 발견한 아래 블로그.
https://blog.naver.com/cnshs99/222433830631
뇌 과민증후군(Brain Hypersensitivity Syndrome)이라는 낯선 병명과 그에 대한 설명, 그리고 과민한 뇌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두통에 대해 이해하기 쉽고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블로그 포스팅이었다.
디스크, 다낭성난소증후군, 흑극색세포증, 인슐린 저항성 어쩌구저쩌구등 평생 살면서 겪었던 통증이나 질환에 대해 네이버로 검색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나는 병에 대해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 그때마다 실망과 짜증을 감출 수 없는 병원 홍보글 혹은 홍보 알바생들이 복붙한 듯한 정보값 0에 수렴하는 스팸 포스팅 무덤 속에서 한 줄이라도 가치있는 정보를 찾아내려고 통증만큼 불쾌한 검색결과 필터링 과정을 거쳐야만 했는데, 이 블로그는 단 한 줄도 걸러낼 이유가 없는, 환자 김나연으로서의 인생에서 최초로 발견한, 유의미한 가치 100인 병원/병원장의 블로그였다. 찌라시와 광고글로 오염된 네이버 블로그 세상에도 이렇게 유익하고 논리적이며 친절한데다 전문지식이 가득한 블로거가 있구나, 진짜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수액이 혈관으로 흘러들어가는 30분간 이 블로그의 뇌 과민증후군 관련 포스팅을 처음부터 정독했고, 특히나 두 번째 포스팅인 "비특이적 증상에 적절한 진단명 붙이기"와 세 번째 포스팅인 "좋은 진단명과 치료적 진단"이란 글을 보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자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는 지식 노동자로서 그의 태도에 공감하고 또 감동받았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하는 일에는 코드명 리뷰와 에러메시지 작성이 포함된다. 둘 다 "이름 짓기" 업무인데, 모두가 가장 난감해하는 작업이다. 이름을 짓는 우리는 어떻게하면 낯선 상황을 맞닥뜨린 사람(유저)이 코드의 이름 혹은 짧은 에러메시지만 보고도 기능의 핵심과 문제의 원인, 해결 방법까지 유추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의사인 그도 진단명에 있어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 두 포스팅은 편두통 이야기와는 다른 이유로 흥미롭게 읽었다.
여튼, 다시 편두통 이야기로 돌아와 그의 포스팅에 기반하자면 흔히 편두통이라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이름으로 불리는 혈관성 두통(이마저도 좋은 진단명은 아니라한다)은 뇌세포가 과민해져 나타나는 기능성 장애 증상의 하나일 수 있다고 한다. 뇌 과민증후군은 다양한 비특이적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인데, 그 중 하나가 두통이요, 두통 중에서도 심한 두통 에피소드를 편두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
편두통이 시작되면 온갖 자극 - 시각, 청각, 후각, 가끔은 촉각까지 - 이 과도한 스트레서로 작용한다는 걸 몸소 겪은 사람으로 언제나 두통의 머리(...) 아니면 심장엔 뇌가 있을 것이라 추정했는데, 이런 가설(?)을 의사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솔깃할 수 밖에.
6.
게다가 그가 뇌 과민증후군과 관련하여 남긴 모든 포스팅은 서문-본문-결론 요약까지 완벽하게 구성되어있고 중간 중간 논문이나 관련 진료 내용 예시 등이 삽입되어있어 거의 교수님이 써주신 강의록 혹은 수업노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 엮어다 단행본을 만들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
찾아가 진료를 받아보고 싶은데 병원이 천안이시더라... 하이고야.
어쨋든 오늘 신경과 다녀온 것도, 김석재 원장의 블로그를 발견한 것도, intp 편두통인에게 너무나 큰 소득이요 기쁨이라 나도 갑자기 장문의 포스팅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