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회사에 다닌다는 걸 티내고 싶어 진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키보드에 엄청 꽂혀 있다.
사실, 발단은 이렇다.
대학원 들어가기 전부터 손목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고, 핸드폰을 바꾼 후로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심해져서 이제 양쪽 손목 모두 시큰시큰 저릿저릿인데...
버티컬 마우스로 바꾸고 핸드폰들 손바닥에 올려두고 손목 스냅 주지 않고 써 봐도 통증은 그대로였다.
세상에 사무직이라면 누구든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테지만
정말 하루 온종일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너무 괴로워서 컴퓨터를 더욱 멀리하고, 컴터와 멀어지다 보니 당연히 글을,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꾸 손목 보호대, 쿠션, 받침대 등을 사들이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사무실 옆자리에 계신 ㅈ가 자신의 키보드를 한 번 써보라고 건내주셨다. 그니까 이거 쓰세요, 는 아니고 이거 한 번 눌러보세요, 훨씬 타자치기 편할걸요?, 하는 의미로 잠깐 빌려주신 것.
오오오 신세계.
뭔가 부드럽게 눌리는 게, 키보드의 키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꾹꾹 눌러대지 않아도 글자가 입력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별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지???
아니 이것이 UMC가 그토록 열변을 토하던 기계식 키보드란 것인가?!?!?
왜 나는 이 세계를 몰랐지!?!
깨달음의 충격도 잠시, ㅈ의 말에 의하면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기계식 키보드를 쓰신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엄청난 헤비 타이핑 워커이긴하지.
생각난 김에 다들 뭐 쓰시는 지 함 볼까, 하고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데, 우리 사무실 엔지니어분들은 두 분 빼고 모두 기계식 키보드를 쓰시더라 (그 두 분은 애플 매직키보드+터치).
와, 뭔가, 억울한 기분. 이런 멋진 문명의 혜택(?)을 나만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ㅈ의 키보드는 거의 30만원짜리였고 (회사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사셨다고. 사실 나도 그 웰컴 버짓이 남아서 그걸로 사려고 했다) 그보다 좀 더 저렴한 키보드 중 유명하다는 ㄷ사의 모델을 추천해주셨다. 근데 디자인이 약간 별로더라고?
그래서 또 미친 듯이 서치를 시작, 반쪽으로 쪼개지는 키보드를 사기로 했다.
이전에 버티컬 마우스를 찾다가 AI의 추천에 따라 자연스럽게 ergonomic(인체공학) 키보드를 보게 되었는데, 분리형 키보드는 그때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다소 생소한 디자인이기도 했고, 뭐 키보드가 이렇게 벌어진다고 해서 뭐 좋은 게 있겠어? 하고 깔끔하게 무시했다.
막상 키보드를 사려고 (후기를 미친듯이)보다 보니, 분리형을 쓰시는 아주 소수의 분들께서 "라운드 숄더와 손목 통증이 많이 좋아졌다"는 식으로 리뷰를 남기셨더라.
라운드 숄더와 터널 증후군, 경추 디스크, 거북목, 골반 틀어짐 등 온갖 관절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본인은 이 리뷰를 보자 마자 이것은 나의 이야기잖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뒤지고 뒤지다 mistel MD600 저소음 적축 RGB모델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
지금 이 글도 그 키보드로 쓰고? 치고? 있다. 아씨, 너무 좋아.
판매처가 많지 않고, 리뷰도 정말 드물어서 약간 고민을 했었는데, 일단 KINESIS보다 디자인 측면에서 훨씬 나았고(키네시스도 분리형 키보드가 유명하더라고요?), 직구를 하지 않아도 됐고, 내게 남아 있던 웰컴버짓 금액과 가격이 비슷해서 골랐다 (얘도 싸진 않았다. 20만원 선).
결제를 다 하고 (사실 다른 기계식 키보드도 하나 더 삼, 걔는 블루투스 지원됨) 너무 신나서 옆자리의 ㅌ과 ㅋ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더니, ㅌ은 "ㅋ는 몇 십 만원짜리 키캡 있어요" 라면서 ㅋ의 키보드 사랑을 알려주시는 것. "키켑에 막 큐빅이라도 박힌 거예요???? 어떻게 ##만원이나 해요?!?!?!" 했더니 ㅋ는 아주 자랑스럽게 직접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셨다. (엔지니어분들의 특징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뭘 여쭤보면 바로 링크를 쏴주시거나 구글에서(무족권 구글) 이미지를 찾아서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신다. 나랑 내 친구들은 줄줄이 글로 쓰거나, 네이버 블로그 리뷰 링크 쏴주는 정도인데.)
ㅋ는 "집이랑 본가에 있는 키보드까지 합치면 한 대여섯 개 될 거예요" 라셨고, "그게 다 달라요? 아, 음, 그러니까 그게 다 사용 용도가 다른 거예요?" 라고 토끼눈을 하고 묻자 "그럼요! 다 다르죠! 키감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고. 사무실에서 쓰는 건 텐키리스(숫자패드가 없는 배열)인데다 조용해서 사무용으로 딱이에요. 화려하고 큰 건 이제 집에서 쓰죠. 게임할 때라든가." 하시는 것.
키보드가 6개씩이나 필요할 수 있다니(혹은 6개씩 살 이유가 있다니) 놀라운 마음에
"저도 사실 그래서 사무용이랑 집에서 쓸 거 하나 더 샀어요. 원래 집에서 5,000원 짜리 다이소 키보드 썼거든요. 근데 넘 힘들더라고요" 하며 나의 고충을 토로했다.
ㅋ는 "네???? 다이소요???? 다이소에서 키보드를 판다고요??? 것도 5,000원이요??????" 라며 나보다 더 놀라시는 것. 무엇보다 어떻게 5,000원짜리 키보드를 쓸 수가 있어요!!! 같은 충격의 표현이었던 듯.
나는 그조차 노트북 스탠드를 사면서 노트북 키보드를 쓸 수 없어지자 궁여지책으로 급하게 사서 썼던 것인데, 흑흑. 스탠드 때문에 노트북 높이가 올라가지만 않았어도 (사실 한 동안은 스탠드에 올려놓은 채로 굉장히 이상한 자세에서 타이핑 했었다) 난 키보드 따위는 사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ㅋ는 키보드 사는 돈 이외에는 사실 자신은 소비할 곳이 없다시며 나에게 키보드를 사지 않으면 뭘 사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ㅋ, 문과생은 키보드 같은 건 사지 않아요... 그냥 사무실에서 주는 걸 쓰죠." 라고 말하고 웃었다.
사무실에서 종종 엔지니어분들과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두 세계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문과생의 세계와 공대생의 세계 가운데 놓인 강이나, 지질단층 같은 것이랄까...
물론 문과생이라고 다 키보드 따위에 관심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공대생이라고 모두 키보드는 기본 6대라고 일반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체적인 성향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게 있다. 문서 작성이나 업무 요청 시 설명 방식, 취미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캐치하게 되는 귀여운 발견들.
여튼, 이렇게 긴 글을 썼는데도 손목이나 어깨가 아프지 않다. 물론 이 키보드는 60% 배열이라 화살표 키도, 홈, 엔드, 페이지 업 앤 다운 키, 딜리트 키 등 넘나 많은 기능용 키가 없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fn키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움 이 있지만 불도 들어오고(색감 조정도 막 한 60단계는 되는 듯) 프로그래밍 해서 매크로 설정도 가능하고(내가 이런 기능에 감탄하게 될 줄이야), 넘 조그맣고 귀여워ㅠ 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
가끔 이렇게 20년 문과생의 IT 회사 근무일지를 써 봐야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러분, 적축 키보드를 사시라!!
미스텔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