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글을 쓰게 되면 꼭 가족 소설을 첫 장편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내 글쓰기 자질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라 그런 글은 평생 태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불쌍한 내 이야기들. 죽은 채 태어나는 아기들을 뭐라고 부르더라?
1. 이 벽엔 주방이 들여다 보이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 집에 살던 두 살 터울의 오빠를 좋아했던 것 같다. 좋아한 건 맞고 두 살 터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2. 양옥식 집이었으나 우리 골목에 있던 모든 집들은 연탄을 땠다. 유치원에 다니던 때였으니까 나는 당연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탄을 때고 늘 온수가 담긴 큼지막한 양은 냄비를 아궁이에 올려놓고 사는 줄 알았다. 아침이면 할머니는 거기서 뜨거운 물을 떠다 내 얼굴을 씻겨주셨다. 내가 혼자 씻을 수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턱받이처럼 목에 수건을 둘러주시는 게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유치원에선 낯을 가리느라 툭하면 점심을 걸렀다. 그래서 늘 무거운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왔고, 할머니가 물에 말아주는 밥을 먹고 나면 마룻바닥에 엎드려 동화책을 읽었다. 그게 지겨워지면 아빠가 사준 베토벤 씨디를 크게 틀고 다락방 계단 앞에 서서 인형놀이를 했다. 모든 집에 다락방이 있고 작은 마당이 있고 사람들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 뒤에서 잠든다고 생각했다.
3. 할머니집 냉장고 위엔 하얀 양철통이 하나 있었다. 내가 모자로 뒤집어 써도 될 크기였다. 새끼 손톱만한 빨간색, 파란색 다이아몬드 패턴이 양철통 겉면에 둘러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아주 크게 백설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통에 손이 닿는 사람은 어른이라고 믿었다.
4. 이 동네는 나한테 그런 의미야. 친구라곤 옆집, 앞집 여자애들, 크레파스와 인형 밖엔 없었던 내 어린시절에 온 걸 환영해.
5. 어제도 하고 싶은 말을 조금씩 자르고 말했다. 요새 자꾸 이런다. 점점 말 하는 게 덧없다고 느껴진다. 말은 할 수록 의미를 잃는다.
2016.10.06
1. 요즘 잡생각이 많다. 밤이 길어져서 그런가. 잠투정도 하고 싶고. 끝이 잘린 막대기인줄 알면서도 제비뽑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2. 어렸을 때, 엄마는 날 수영선수로 키울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아나운서는 안되겠다 싶었던 거지. 하지만 나는 경쟁심이나 승부욕 같은 건 타고나질 못했다. 엄만 내 재능이 무엇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잘 알지 못한다. 엄마 뜻대로 되지 않는 나를 답답해했고 엄마의 성화에 못이긴 아빠는 가끔 호텔 수영장에 아는 친구가 있다며 워커힐이나 하얏트에 날 데리고 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친구가 있긴 했나 모르겠다. 뭘 잘 모르던 유치원생 일 때도 직감적으로 호텔 수영장에선 굉장히 점잖게 행동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탈의실 조명부터 동네 스포츠센터와는 달랐으니까. 호텔에 가면 꼭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아빠가 창피하지 않도록 열심히 어른 흉내를 냈다. 아빠의 프라이드를 타고 호텔 수영장에 갈 때만큼은 수영이 재미있었다. 아빠와 단 둘이 외출하는 주말은 사실 늘 재미있었다. (사실 경륜장을 제일 자주 갔다)
그 시절 앨범 속엔 검은색, 흰색 줄무늬가 굵게 새겨진 나시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아빠 옆에 쪼그려 앉은 내가 있다. 워커힐에서 찍었던 사진. 아빠 껌딱지.
3. 아빠가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4. 워커힐은 W가 있고 쉐라톤 그랜드 본관, 더글라스 별관이 있는데 더글라스는 방도 좀 저렴하고 더 산 속에 있어 엄청 조용하다. 그리고 낡았다. 그래서 좋아한다. 돈 열심히 또 모아서 한 번 더 가야지.
5. 지금은 수영 1도 모른다. 그냥 체격만 수영선수.
6. 그리고 저건 당연히 IMF 이전 이야기.
2016.09 추석 어느 날
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날의 추억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내 역사의 80%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2. 예전 외할머니 집은 아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도식당(체인이 되었으니 본점)과 마주보고 있었다. 골목에서 땅따먹기를 할 때도, 분필로 벽화를 그릴 때도, 골목엔 잘 구운 고기 냄새가 자욱했다. 성인 셋이 나란히 서면 꽉 차는 그 골목을 나와 사거리를 한 번 건너면 두 이모할머니가 살고 있는 전어집 건물이 나온다. 원래 작은 이모할머니는 대도식당을 포함해 동네 밥상에 오르는 쌀을 책임지던 일신상회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동네에 큰 슈퍼마켓과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할머니는 업종을 바꿨다. 그리하여 지금 1층에는 가을이면 집 나간 며느리를 부르는 전어떼가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약 4년동안 건물 3층에 살았었다.
3. 우리집은 그후로 두 번 이사를 하고 지금 사는 집에 정착했는데 그래봤자 이모할머니네서 도보로 6-7분 거리쯤 된다. 여기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녔기 때문에 나는 서울 안에서 왕십리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4. 우리집에서 나오면 바로 뉴타운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솔직히 내 추억의 한뭉탱이를 짓밟고 선 아파트가 곱게 보일리 없지만) 뉴타운 덕분에 할머니네 건물은 그 값이 배 이상 올랐다. 그래도 할머니가 절대, 네버, 에버, 집을 팔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나와 같은 해 태어난 무언가가 또 허물리고 갈기 갈기 해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201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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