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4.

인물화




1. 강산 오빠
오빠를 처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나의 영원한 꽈장사과대 사과의 아이콘 현석 오빠가 사회학과에 대한 아무런 임팩트 없는 소개글을 읽어주고 우리를 작은 소그룹으로 찢어 캠퍼스 투어를 가자고 했다전날 눈이 왔었는지 혹은 그냥  겨울이 유난히 추워 쌓인 눈이 미처 녹지 못했던 탓인지남산 언덕이 드문드문 하얗게 세었  같다백설이 내려 앉은 검푸른 남산을 등지고 서있던 강산 오빠는 길고 날렵한 깃이 옷자락을 따라 둥글게 구르다, 종아리께를 감아 돌아 등뼈 바로 밑 트임으로 매끈하게 이어진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둥근 코트 앞자락이며 눈꼬리가 한껏 올라간 오빠의 캣츠아이 뿔테안경까지, 시리도록 새하얗던 오빠의 피부톤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신선한 비주얼 충격이었다. 그후로 줄곧 그날 오빠가 입은 옷이 너무 근사해서 그게 내 호기심을 자극한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에 압도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날 바로 '저 선배랑은 꼭 친해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는 예상보다 훨씬, 사람을 좋아했다. 그리고 역시나 옷을 좋아했다. 과실에 가만히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는 오빠를 가만히 보다 한 마디씩 붙이면 오빠는 그 누구보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강산 오빠는 좋아하는 옷을 예쁘게 입고 싶어 꾸준히 맨몸운동을 하고, 일본어를 배워 옥션과 이베이에서 보물같은 빈티지 옷들을 찾아냈다. 현석 오빠를 비롯, 선배들은 강산 오빠를 "면봉선생"이라 불렀다. 나는 오빠의 새하얗고 깡마른 체구가 어째서인지 갑각류나 곤충의 배 같아서, 혹은 오빠가 검은색 옷을 하도 좋아해서, 혹은 그 두 가지를 합쳐놓았을 때 오빠가 작고 딱딱한 껍데기를 두른 것처럼 보여 종종 "오빠, 뭔가... 바퀴벌레 같은 느낌이에요." 라는 망언도 했었다. 그 망언까지 "음, 나연이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지 뭔가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난 정말 복에 겨울 만큼 사랑받고 컸구나...) 
졸업 후 한동안 오빠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땐, "그래도 너희들 앞에 뭔가 제대로 된 모습일 때 알려주고 싶었었다"며 그제서야 오빠가 일하는 곳을 일러주었다. 로리앳이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게 그 때였다. 오빠가 원했던 의상파트는 아니지만 오빠는 힘들다, 내 기대와 다르다, 이 바닥도 별거 없다는 둥의 시덥잖은 푸념을 늘어놓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오빠는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단단한 알맹이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지식하지 않으면서 예의바르며 공손했고, 요란법석 떨지 않아도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오빠 소식을 들은지 또 한참 되었다. 오빠를 언제고 다시 만나면 건강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따뜻한 쇼콜라쇼 한 잔 사드려야지.



2. 영배와 인영이
처음 만나 말 몇 마디 섞었을뿐인데도 '아, 곱다' 하는 느낌이 오는 친구들이 있다. 본인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고르는 단어, 단어를 정렬하는 방식, 그 단어들을 소리내어 말할 때의 음색과 음률, 말을 뱉으며 짓는 표정과 몸짓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 친구들의 민감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본인들은 아마 잘 모를거다. 짙은 색도 아니며, 극단적인 온도도 아니지만 고유의 세계가 있는 아이들. 유한듯 보여도 올곧고 맑은 아이들.
영배는 처음 그런 느낌을 주었던 친구다. 단순히 신영복 선생님이 계시다는 이유로 무한호감의 대상인 성공회대 사과대생이며, 동일한 맑음을 지닌 아름이의 후배인 영배는 대외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별로 좋은 멘토 재목이 아니었음에도 당시 영배는 내 멘티였고, 나의 투박하고 거칠다 못해 한심스러울만도 한 언행들을 너무 너무 수줍어하는 미소로 받아주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큰 영배에게 쉰 소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내가 영배의 막내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2박 3일의 활동이 끝나는 날, 영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큼지막한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 하고팠던 이야기,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적어 건내주었다. 영배에게 여태 한 번도 말은 못했지만, 그 카드 열어볼 때마다 운다. 뭔지 모르겠다. 겨우 2박 3일 대화 나눈 게 전부인 사이였는데다, 나보다 너댓살은 어린 남자 동생에게 그런 고운 마음을 받은 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영배를 못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요새는 인스타에서 가끔 좋아요를 눌러주고 간다. 언제라도 좋으니, 누나 밥 사주세요, 하면 누나가 버선발로 뛰쳐나갈게.
인영이도 비슷한 케이스다. 인영이는 다행이도 학교 선후배로 만나, 영배보단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MT에 여행에, 식구처럼 밥 먹을 일도 많았다.

인영이는 내일 만날거니까, 내일 만나고 와서 더 생생한 기억으로 적어야지.



아아, 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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